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영월장릉-하마비,배견정,낙촌비각

여울가 2020. 9. 11. 15:18

영월 장릉을 탐방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는데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이 많았다.

*장릉 (莊陵) 사적 제196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2009.06.30)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능

단종은 제5대 문종의 아들로 1452년 문종이 재위(2년 4개월만에 세상을뜨자,

12세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하루만에 승하하였다.
단종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자

1455년(단종 3) 세조에게 왕위를 내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이 시도한 단종 복위 운동을 실패로 돌아갔고,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렴포(명승 제50호)로 유배 되었다.

그 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물에 잠길 것이 염려되어

영월 읍내에 있는 객사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 해 세조가 내린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사실은 금부도사가 차마 사약을 진어하 못하고 눈물만 흘리자

남종이 화살줄로 뒤에서 목을 조르는 바람에 승하하셨다.

1698년(숙종 24)11월 6일에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1)하마비
영월 장릉 입구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있는 비석으로
'大小人貟皆下馬碑(대 소 인원 개 하마비)'

많은 인원이든 작은 인원이든 모두 말( 또는 가마)에서 내려야 함을 알리는 표지석이다.

(2)배견정(실습 시나리오)

안녕하세요?
강과 산, 별빛과 바람이 아름다운 영월을 찾아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저는 영월군 문화관광해설사 ***입니다.

여러분을 모시고 단종의 능이 있는 장릉을 소개해 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이런 귀한 시간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함께 장릉을 돌아보시기 전에 협조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잔디밭에는 해충이 있을 수 있으니 들어가지 마시고, 릉이 있는 곳이니
너무 큰소리로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음 하는 부탁드립니다.

오늘 맨 먼저 소개해 드릴 곳은 장릉에서 들어 오시자마자
오른쪽 언덕 위에 보이는 자그마한 정자에 대해 소개해 드릴게요.
지금부터 배견정(拜鵑亭)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글자 그대로 절 배拜, 두견이 견鵑, 정자 정亭을 써서
‘두견새가 절을 하는 정자’라는 뜻이랍니다.
이렇게 이름이 지어지게 된 사연은 지금으로부터
563년 전인 14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조는 자신의 조카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씨 왕가의 족보에서 노산군이라는 이름을 지우게 하고 순수한 평민

홍위(弘暐)라는 이름으로 사약을 내려 그해 10월24일 유시(酉時.오후5시~7시 사이)에

영월의 객사인 관풍헌에서 승하하게 되십니다.

이 때에 노산군을 모시던 여섯 명의 시녀(시녀3인, 종인3인)는
영월을 굽이돌아 흐르는 금장강(錦障江. 동강의 옛 이름)에 몸을 던져 순절(殉節)하게 됩니다.
지금의 동강이 당시에는 금장강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모시던 임금님께서 먼저 승하하시자
바로 그날 '우리들이 더 살아서 무엇하랴, 저승에서라도 우리 임금님을 편히 모시자’ 라며
높디높은 절벽위에서 강물로 뛰어내렸던 것입니다.

후대에 그 자리에 순절지처(殉節地處)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곳을 낙화암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충남 부여에만 낙화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 영월에도 낙화암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르셨지요?

바로 이 순절한 여섯 시녀의 영혼이 두견새가 되어
노산군이 암장되어 있는 이곳 동을지산(冬乙智山)을 매일 찾아와 임금님께 문안을 여쭙고,
그 영혼을 위로하듯 슬피 울었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임금님이 승하하신지
335년째 되던 해인 1792년에 이르렀는데
영월부사 박기정(朴基正)이 마음의 귀를 열고 들어보니 아무도 듣지 못하던

두견새들의 문안 여쭙는 두견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어요.

뾰족하게 솟은 바위 위에서 울어대는 두견새들의 모습을 보고 박기정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편하지 않게 편안하게 임금을 배알하라고

두견새가 울던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워 그 이름을 배견정이라 짓고,
그 정자의 초석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 오른쪽에 배견암(拜鵑岩)이라 새기게 되었답니다.

사람이 아닌 새에게 지어준 세계에서 유례없는 새를 위한 정자입니다.

살아서 자기들이 모셨던 노산군을 따라 순절한 여섯 시녀들이 두견새가 되어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고 울었으니 아마도 옛 어른들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키고자 했던 충절의 덕목은 이러해야 한다고

우리 후손들에게 일깨워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도 지금 조용히 눈을 감고
두견새들의 울음소리를 한번 들어보실까요?
모두들 들리시나요?

(3)낙촌비각(駱村碑閣)

주소: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
시대: 현대(1974)
용도: 기타건축-무덤
지정문화재: 미지정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낙촌기적비각이 있으니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 길이 없어 풍설 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거듭하는데,

1541년에는 7개월 동안 3인(박세호, 권수중, 연현령)의 수령이 원인 모르게 죽었다.

김희성은 두려워서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충원은 신축년 1541년 중종36년 9월 7일에 부임하여 약 5년간 재임하였다.

*내려오는 설화 첫째 이야기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群吏(군리)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받들어 온 세 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 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은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번째 있던 이(성삼문으로 추정)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

*내려오는 설화 두번째 이야기
영월수령으로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자
박충원은 영월수령으로 가겠다고 자청하였다.
부임한 날 밤에 촛불을 밝히고 의관을 정제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비몽사몽간에 단종의 영혼이 나타났다.
단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전임수령들은 나를 보자마자 혼절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었는데

너는 예를 갖추어 나를 이렇게 맞이해주니 고맙구나.

내 어려움을 해결해 주면
너에게 복을 내리겠다."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을 꾼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담장 밖은 죽어있을 수령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멀쩡한 모습으로
나오는 박충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모두 안으로 드십시오. 안그래도 어른들을 뵈러 나갈 참이었습니다"
간밤에 임금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면서 혹 아시는 이야기가 있는지 여쭈니

겸손한 군수의 때도에 그때까지 숨겨왔었던 임금님의 능침으로 인도하였다.
임금님의 능은 가시덤불로 덮여있었고 봉분의 높이는 2자밖에 되지 않은 봉분을 높여서 봉축하고
제문(노릉제문 ,祭魯陵文 )을 짓고 제물을 준비하여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을 조정에 보고하게 되었다.관리가 행한 일은

반드시 필사본을 남겼기에 후세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박충원은 5년동안 영월군수를 지냈으며
후에 대제학 병조판서까지 벼슬에 올랐다.

1973년 문중비사에서 이 사연을 알게 된 밀양박씨 문중에서 청하게 되어 이곳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정문이 이곳이 아니라 좀 더 안으로 들어가 있었기에

그냥 산자락의 귀퉁이에 세웠던 것인데 정문이 밖으로 더 나갔고,

더구나 능침으로 오르는 길이 새로 생겨서 능침의 오른쪽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내 어려움을 해결해 주면 복을 주겠다는 단종의 꿈에서의
약속이 오늘날 이렇게 지켜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종의 능침 오른쪽에 위치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 자리에 비석이 서 있으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여기서 해설사의 한마디...
준비된 만남은 반드시 복으로 화답하고 준비가 없는 만남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이 박충원의 비가 알려주고 있다.

영월장릉 하마비,배견정,낙촌비각
https://youtu.be/mmIqJlxGGqE

 

 

 

 

 

 

 

 

 

 

 

 


#영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