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승하 장소 관풍헌과 자규루
자규루는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을 때
잠시 지내던 곳이다.
단종은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를 지었다고 한다.
자규란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견주어 지은 것이다.
원래는 세종 10년(1428) 군수 신권근에 의해 지어져 ‘매죽루’라 불리웠으나
단종의 자규시가 너무 슬퍼 누각이름을 매죽루에서 자규루로 바꿨다고 한다.
그 후 많이 퇴락해 민가가 들어섰는데, 정조 15년 (1791)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과
영월부사 이동욱이 이곳을 돌아다니다 그 터를 찾아 복원하였다.
1790년에 이 자리에는 초가집 다섯채가 있었는데 불이 나서 초가집이 홀라당 타 버렸다. 그 때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이 재들을 모두 걷어내니 자규루의 주춧돌이 발견되어 이곳이 관풍헌이 있던 터임을 알게 되었다.
11월에 관풍헌을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깊은 산골에 눈이 쌓여 소나무 채취가 어려웠다.
때마침 폭우가 3일이나 쏟아져 눈을 다 녹였으니 소나무를 벨 수 있었고 돌을 캘수가 있었다
1791년 3월에 마침내 복원을 하게 되었다.
그해 3월에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이 4월 17일에
내각에 보고하기를
"강원도 감영에서 자규루를 중건하여 어제를 봉안하려 합니다.
사방을 차단하는 가로막이 없으니 널문으로 사면의 복합문을 조성하여
존승과 공경의 뜻을 부치고자 합니다."
하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전교가 내려졌다.
판중추부사 이복원(延安李公 福源)은 중건자규루기(重建子䂓樓記) 기문을,
좌의정 채제공(平康蔡公 濟恭)과 이조판서 홍양호(豊山洪公 良浩)는
자규루상량문(子䂓樓上樑文)을 어명에 의하여 찬술 되었다.
*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 관풍헌
관풍헌은 영월읍 영흥리 984번지에 있는 것으로 본래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이다.
단종은 본래 청령포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마침 홍수가 나서 이곳으로 옮겨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를 즈음해서 단종 복위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곤 해서
세조는 결국 단종에게 죽음을 내림으로써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457년(세조 3) 10월 24일 단종은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미처 진어하지 못하고
눈물만 흐르고 있자, 공생 화득이
뒤에서 활줄로 목을 졸라 승하하시게 되었다.
공생은 이일이 있은 후 9구멍에 피를 흘리면서 그 자리에서 죽었다.
노산군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곳이 바로 이 관풍헌 앞마당이다.
현재는 보덕사 소유로 되어 있으며 포교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노산군,금부도사,공생의 역할극을 체험-노산군은 툇마루에 정좌하고,
금부도사는 훌쩍훌쩍, 공생은 손수건으로 노산군의 목을...)
객사의 기본 모양은 좌익실 정당 우익실이 일직선으로 되어있고 정당의 계단이 양쪽보다 높다.
이것은 사람 인(人)자의 모양을 하고 왼쪽이 남자,
그 획을 받치고 있는 버팀목이 오른쪽 여자를 의미한다.(남좌여우,男左女右)
여자가 남자를 버텨주지 않으면 남자는 혼자서 살기가 힘들어진다.
무릇 어른이 되려면 남자 여자가 서로 받쳐주는 혼인 이후에라야 어른이라고 생각하였다.
오른쪽 좌익실에 단종이 거하셨다.
월중도에 보면 관풍루라고 써 있으나 단종이 복위되어서 루가 아닌 헌이 된 것이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서 루각의 이름이 바뀌는데 단종의 어진이 모셔진 영모전도
영모루가 아닌 전이라고 한다.
좌익실은 망경헌으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아침에 궁궐의 궐패를 모셔놓고 궁궐을 향해
살아있는 임금님께 예를 바쳤다.
왕릉,서원,객사를 드나들 때는
동입서출(東入西出)로 동쪽 문으로 들어가서
서쪽 문으로 나온다.
*관풍헌 중수기는 이명식(1720~1800)이 지음
조선중기 문신,본관은 연안,자는 건중이다.
쓴 사람은 영월부사 박기정(1748~?)이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조선후기에 영월부사,황해도 관찰사,대사간,병조참판을 지냄.본관은 순천
★단종의 자규시(子規時)
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한 마리 원한 맺힌 새가 궁중을 나온 뒤로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 푸른 산 속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을 못 이루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연년한불궁)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은 끝이 없구나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두견새 소리 끊긴 새벽 묏부리에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피 뿌린 듯 봄 골짜기에 지는 꽃(두견화)만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하늘은 귀머거리인가 슬픈 이 하소연 어이 못 듣고
何乃愁人耳獨聰 (하내수인이독총)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端宗의
『장릉지(莊陵誌)』의 자규사(子規詞)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
(月白夜蜀魂啾 월백야촉혼추)
시름 못 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
(含愁情依樓頭 함수정의루두)
울음소리 하도 슬퍼서 나 괴롭구나
(爾啼悲我聞苦 니제비아문고)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
(無爾聲無我愁 무니성무아수)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寄語世上苦榮人 기어세고영인)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愼莫登春三月子規樓 신막등춘삼월자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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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영월부 관아' 사적 지정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은 조선의 제6대 임금인 단종이 유배 중 숨을 거둔 장소인
'영월부 관아'(寧越府 官衙)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4호로 지정했다고 8일 밝혔다.
영월부 관아는 조선시대 영월부의 행정 관청으로 건립됐으며,
현재는 관리들의 숙소인 객사(客舍)와 2층 누각인 자규루(子規樓)가 남아 있다.
객사는 1396년 창건된 뒤 1791년 재건됐으며 서익헌(西翼軒), 정청(正廳), 동익헌(東翼軒)이
한 줄로 배치돼 있다.
동익헌은 1457년 10월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승하한 곳으로,
'관풍헌'(觀風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자규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로 본래 명칭은 '매죽루'(梅竹樓)다.
관풍헌에 머물던 단종이 이곳에서 소쩍새(자규·子規) 울음소리를 듣고
시를 읊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2016.3.8 [문화재청 제공]
영월 관풍헌과 자규루
https://youtu.be/ACe9AMHPdK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