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영월10경,난고 김삿갓 문학관
여울가
2020. 11. 20. 12:37




















김삿갓은 양반의 신분을 버리고 방랑하는 삶을 선택한 조선후기의 방랑시인이다.
그는 한시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던 천재시인이다.
김삿갓은 당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는 스스로 성만 이야기 할 뿐 이름을 밝히지 않아 사람들은 삿갓을 쓰고 다닌다하여 김삿갓이라 불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1807~1863)으로 자는 성심,호는 난고이고 삿갓(립)은 방황할 때 불리던 이름이다.
조선의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평안도 선천 부사였던 할아버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에 싸우지도 않고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의 구원으로 형 김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공부하였다.
후에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이 되자 형제는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아버지 김안근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두려워 강원도 영월의 깊은 산속으로 숨어 살게 되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은 20세에
영월부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을 차지하게 된다.
시제는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는데
이는 '가산군수 정 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하늘에 닿은 김익순의 죄를 탄하다.'라는 뜻이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고하게 되니 그때서야 어머니는 김익순이 병연의 조부임을 밝히고,
그때 조부를 욕한 못된 죄인이라는 자책감으로 하늘을 바로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으면서 차남 익균을 낳았다.
또 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를 돌았다.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랐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 집에서 1년정도 훈장노릇을 하였다.
김삿갓의 방랑은 철종14년(1863)에 전남 화순 동복에서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아들 익균이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영월은 김삿갓의 방랑의 시작지이자 종착지가 되었다.
난고 김삿갓 문학관
https://youtu.be/SoMYoN6It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