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영월 10경 중 제4경 김삿갓유적지와 문학관

여울가 2021. 9. 23. 08:04

영월 10경 중 제4경 김삿갓유적지와 문학관

난고 김삿갓 문학관은 영월의 인물 김삿갓의 일생과 그의 지은 시의 문학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자 2003년 10월에 개관되었다.

김삿갓에 대한 문헌기록이 부족해서 마치 전설 속의 인물처럼 여겨졌었는데 이런 김삿갓의 행적을 찾아준 사람은 영월의 향토사학자인 정암 박영국 선생이다.
박영국 선생은 20여년의 노력으로 전국을 다니면서 김삿갓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1982년 김삿갓 묘소와 주거지를 찾게 되었다.

문학관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은 박영국선생이 모아온 서책과 연구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김삿갓 문학관은 김삿갓의 얼과 생애, 그가 남긴 시의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의미가 크며 그의 시가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세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곳이다.
김삿갓 유적지에서는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 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또한김삿갓을 기념하는 유적지와 부대시설이 조성되어 있어 김삿갓의 향취를 가득 느낄 수 있다.

김삿갓 묘소는 1982년 확인되었으며, 유적지 중 집터의 주거지 건물 또한 1982년에 발견되었다. 2002년에 새로 복원해 지었으며,
매년 10월에 김삿갓 묘역이 있는 김삿갓면 노루목 마을에서는 추모제, 추모 살풀이춤, 백일장 등의 문화행사와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체험행사가 열려 관광객들과 함께 김삿갓을 기리고 있다.

★난고 김병연(삿갓)의 생애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1807~1863)으로 자는 성심, 호는 난고이다.

김삿갓이 다섯 살 되던 해에 서북인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 1811년에 난을 일으키자,

문관인 정시 가산 군수는 끝까지 저항하다 장렬하게 전사 하였으나,
정작 싸워야 할 무관인 김삿갓의 조부인 선천부사 김익순은 세가 불리하자 거짓 항복하였다가
적진에서 탈출하여 다시 관군에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항복하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그 이듬해에 난이 평정 되자 역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당하고 만다.

멸족의 멸문지화의 위급 속에서 어머니는 세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곡산의 종복인 김성수의 집으로 도망쳐 살게 되지만 그곳에서 아버지와 동생은 죽게 되고, 김삿갓이 여덟 살 되던 해에 멸족에서 사면되어 죄가 조부에게 국한되자

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 어머니는 자식들이 멸시 받는 것이 싫어 황해도 곡산을 떠나

이천, 가평, 평창을 떠돌다 영월 삼옥리에 정착하게 된다.

김삿갓은 스무 살 되던 해에 영월 동헌에서 실시한 백일장에 응시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시제가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었는데
이는 '가산군수 정 시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우러러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다.'라는 뜻이다.

조부의 사연을 모르고 자란 김삿갓은 정시 가산 군수를 예찬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은 한번 죽어서는 너무 가볍고

만번 죽어 마땅하다라는 답안으로 장원을 하게 된다.

장원을 한 뒤 모친의 말에 의해 선천부사 김익순이 자기 조부임을 알게 된 김삿갓은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안고
병연은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고 하늘을 볼 자격이 없다면서 삿갓을 쓰고 해를 보지 않고 살았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김삿갓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0세 무렵부터 영월을 떠나 방랑을 시작하였다.
김삿갓은 조선팔도를 방랑하며 그가 본 자연과동식물, 사물 그리고 그가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남겼다.

김삿갓은 한시의 전형적인 주제와 틀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던

민중시인이다.
그의 시 소재는 매우 다양한 인물과 사물을 진솔하면서도 풍자와 해학성을 살려서 표현하였다.

김삿갓은 철종14년(1863)에 전남 화순 동북에서 57세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3년 뒤 아들 익균이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동북에 내려가 김삿갓의 묘를 영월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으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