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위 고성대 베드로
고성대(? ~ 1816)는 충청도 덕산 별암(현 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이다.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지만 곧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형제는
매일 시간을 정해 8개월 동안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모든 신자들이 감탄할 정도였다.
또 언제나 성서를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던 그에게
감복하지 않는 교우들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신유박해 당시 전라도 고산 저구리골(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에 이주해 살다가 체포돼
전주관아에서 고문을 당하던 고성대는 처음엔 용기있게 신앙을 고백하다가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유혹에 굴복해 풀려난다.
이후 "이 엄청난 죄를 속죄하기 위해선 내게 단칼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고 되뇌곤 하던 고성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아우 성운(일명 성일)과 함께 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경상도 청송 노래산(현 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한 뒤에도
그곳 신자들과 함께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1815년 2월 22일께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
급습한 경주 관아 포졸들에게 체포된다.
이것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과 지방 관리에 의해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시작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경주로 압송된 형제들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는 가운데서도 굳게 신앙을 지켰다.
이에 경주 관장은 형제와 함께 배교를 거부하는 또 다른 교우들을 대구감영으로 이송한다.
대구 감사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그를 지켜본 뒤 이를 조정에 보고한다.
"고성대는 어리석고 무식한 무리로 천주교에 미혹돼 깨달을 줄을 모르며,
엄한 형벌로 깨우쳐주려 했지만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또 한 번 죽기로 한 마음을 목석과 같이 고집하니 이들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드디어 1816년 12월 19일 대구 형장에서 구성열(바르바라, ?~1816) 등 5명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진다. 순교 뒤 형제 등 7명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이듬해 4월 17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거둬졌다.
이 가운데 매장된 지 3개월이 훌쩍 지난 형제의 육신은 특히 빛이 났고
눈부신 무언가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마치 조금 전에 죽은 것처럼 보였고, 잘 보존된 형제의 옷은 습기조차 스며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 형제와 순교자 5위의 이름과 덕행 실천, 신앙 고백의 발자취는
모든 교우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빛나는 모범이 됐다.
▲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전주에서 배교했으나 1815년 을해박해 당시 다시 체포된 고성대ㆍ성운 형제는
경주관아를 거쳐 대구감영 옥사에 수감돼 17개월에 이르는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짚신을 삼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림: 탁희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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