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건너서/2013 중국 성도·구채구·황룡

삼국지의 인물들이 한곳에 모인 무후사

여울가 2013. 6. 13. 10:57

 

중국 사천 성도(中國 四川 成都)는 삼국지로 유명한

촉나라의 수도로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성도시 남쪽에는 유비를 모신 한조열묘와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무후사는 중국 3세기를 풍미한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을 기리기 위해

서진영안 원년에 만들어진 사당이다.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라 칭해지는 북, 동고의 문화재가 있다.

이곳에는 이들의 동상과 업적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원래는 이곳에는 5세기에 유비를 모시는 사당이 있었고,

 

 

 

 

 

 

 

 

 

 

 

 

 

공명의 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14세기 말엽에 합친 것이다.

 

 

 

 

 

 

 

유비가 주군(主君)이었던 까닭으로  원래의 명칭은

유비의 시호 소열제에서 따서 한소열묘(漢昭烈廟)였지만,

제갈공명의 지혜를 높이 샀던 사람들이

그의 시호인 충무후(忠武侯)를 본따서

일반적으로 무후사라고 부르게 되었고,

면적 3만 7,000㎡으로 현존하는 건물은 1672년에 재건된 것이다.

중국 역사상 군주와 가신을 한곳에 모신 곳은 이곳 뿐이라고 한다.

 

사당 내에는 유비의 묘라고 전해지는 혜릉(惠陵)을 비롯하여

유비전, 제갈량전, 문장·서법·석각기술 면에서 뛰어난 삼절비(三絶碑) 등과

삼국지연의 곳곳에서 등장하는 관련 자료들이 있다.

 

뒤곁에 나가면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복숭아밭도 있고,

우거진 대나무 숲을 지나면

유비의 묘소가 나온다.

 

일화에 따르면

어느날 도굴꾼이 이 묘지를 털려고 들어갔는데

유비,관우,장비가 바둑을 두고 있고, 몰래 진주 목걸이를 훔쳐서 나왔는데

밖에 나와보니 진주목걸이가

아니라 뱀을 감고 있었다고...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 후로는 도굴꾼들이 얼씬도못하게 되었단다.

 

 

                                    삼고초려

 

유비는 군기를 잡고 계책을 세워 전군을 통솔할 군사(軍師: 군대의 우두머리)가 없어

늘 조조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했다.

어느 날 유비가 은사인 사마 휘에게 군사를 천거(薦擧)해 달라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복룡이나 봉추 중 한 사람만 얻으시오."

"대체 복룡은 누구고, 봉추는 누구입니까?"

그러나 사마휘는 말을 흐린 채 대답(對答)하지 않았다.

그 후 제갈 량의 별명이 복룡이란 것을 안 유비는 즉시

수레에 예물을 싣고 양양 땅에 있는 제갈량의 초가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제갈량은 집에 없었다. 며칠 후 또 찾아갔으나 역시 출타하고 없었다.

"전번에 다시 오겠다고 했는데. 이거,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그 자는 아직 나이도 젊다던데..."

"그까짓 제갈 공명이 뭔데. 형님, 이젠 다시 찾아오지 마십시오."

마침내 동행했던 관우와 장비의 불평이 터지고 말았다.

"다음엔 너희들은 따라오지 말아라."

관우와 장비가 극구 만류하는데도 유비는 단념하지 않고 세 번째 방문길에 나섰다.

그 열의에 감동한 제갈량은 마침내 유비의 군사가 되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100만 대군을 격파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유비(劉備, 161년 ~ 223년)

 

자는 현덕(玄德). 중국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개국 황제.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황족의 후예임에도 삶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짚신, 돗자리 등을 만들어 팔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군웅들과 달리 아무런 기반도 없이 결의 형제들과 함께 거병하였다. 

원소, 원술과의 동맹에도 참여하고 황건적을 토벌하는 등

여러 차례 전투에 참가하였으나

뚜렷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고 도겸, 유표, 조조에게 의탁하는 등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았다.

하지만 제갈량, 조자룡 등 인재를 등용하면서

서서히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고

손권과 손잡고 적벽에서 조조를 대패시켜 천하 삼분지계를 완성한다.

그 후 스스로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촉한의 황제가 됐으나

결의 형제인 관우와 장비가 잇따라 사망하자

그 복수를 위해 무리하게 대군을 일으켰고

결국 이릉에서 대패하여 제갈량에게 나라를 맡기고 세상을 뜬다.

 

 

악비가 쓴 출사표

 

 

촉나라의 무신들

 

 

 무후사

 

 

 

 

                                       제갈량(諸葛亮, 181~234)

 

자는 공명(孔明).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세상을 피해 은거했음에도

그 명성과 학식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불렸다.

207년에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에게 발탁된 후 천하 삼분지계를 준비한다.

다음 해에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대전에서 계략을 써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다.

유비는 점점 더 제갈량을 신임했고 황제에 오른 후에는 그를 승상으로 삼았으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나라와 자식을 모두 부탁했다.

유비는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이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황제에 오르지 않아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유선에게 충성을 다하였다.

두 번에 걸쳐 출사표를 쓰고 직접 군을 지휘하여 출병하였으나

전쟁 도중 사망하고 만다.

그의 출사표는 지금까지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문장으로 꼽힌다.

   

제갈공명의 손자

 

 

 

 

 

 

          

 

 

 

 

 

 

도원결의(桃園結義) 

 

전한(前漢)은 외척(外戚)에 의해 망했고

후한(後漢)은 환관(宦官)에 의해 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한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은 황건적(黃巾賊)의 봉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문란한 국정에 거듭되는 흉년에 백성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태평도(太平道)의 교조 장각(張角)의 깃발 아래로 모여 들어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떼가 되었는데

그 수는 무려 5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은 이들 난민들 앞에서는 너무도 무력했다.

당황한 정부에서는 각 지방 장관에게 의용병을 모집해서 이를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유주(幽州) 탁현에서 의용군 모집 공고문을 본 유비(劉備)는

나라 걱정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때 유비를 끄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장비(張飛)였고, 그 다음에 관우(關羽)를 만났다.

그들 셋은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며 서로 나라 걱정을 하다가

 의기가 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함께 일어서기로 결심을 했다.

장비의 요청(要請)으로 그의 집 후원 복숭아밭에서 세 사람이 의형제(義兄弟)를 맺고

천하를 위해 일하기로 맹세를 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에 이어서 세 사람은 3백명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황건적 토벌에 가담하게 되었고

그 후 제갈공명을 군사로 맞아들여

유현덕(劉玄德)은 위나라의 조조[魏], 오나라의 손권[吳]과 함께

촉(蜀)나라를 세워 삼국시대를 이루었다.

 

 

 

 

 

 

 

 

 

 

 

 

 

  유비의 무덤임을 알리는 '한소열황제지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