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서울

[서울/중구]도봉구의 인물, 노동 운동가 전태일의 발자취를 찾아서,,,청계천

여울가 2015. 10. 29. 17:42

 

도봉구에 살았던 노동 운동가, 전태일 열사

 

전태일(全泰壹)은 1948년 8월 26일 대구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사이의 2남 2녀 가운데 맏이로 태어났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은 후 노동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여동생 전순옥도 노동 운동가가 되어 활동하였고 2012년에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전태일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1964년 17세의 나이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였다.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꼬박 3년을 보내고 미싱사, 재단 보조 등을 거쳐

오랜 소원이던 ‘재단사’가 되었다.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 잔 값이던 일당 50원을 받았는데,

 자신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노동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8년에 우연히 「근로 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고는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969년에는 평화 시장 최초의 노동 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근로 기준법」의 내용과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 활동은 사업주들의 탄압으로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 일로 평화 시장에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었다.

 

1970년 9월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 친목회를 조직하였다.

다시 노동 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내용이 『경향 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정부의 약속 위반과 사업주들의 무시로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되었다.

 

이에 전태일과 삼동회 회원들은 1970년 11월 13일 「근로 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 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 시장 앞에서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는 등 시위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을 때,

 전태일은 갑자기 몸에 석유를 끼얹어 불을 붙이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온몸에 불이 붙은 채 평화 시장 앞을 달리다가 쓰러졌고, 그날 밤 사망하였다.

 이후 전태일의 유지를 받든 어머니 이소선을 비롯한 노동 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청계 피복 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정기 건강 진단, 일요일 휴무 등이 관철되었다.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근무하던 시절 거주했던 곳이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였으며,

 현재의 지번은 도봉구 쌍문동 56번지로 삼익 세라믹 아파트가 들어섰다.

 삼익 세라믹 아파트 112동이 전태일의 집이 있던 곳이다.

 

전태일의 일터였던 평화시장과 청계천,

그리고 전태일교에 설치된 전태일 열사의

흉상을 찾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