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가톨릭 성지순례(국내)

[전북/완주]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천호성지를 찾아서...

여울가 2010. 11. 2. 09:01

새천년복음화사도회와 하느님의 백성 공동체의 2010년 성지순례지로 정해진 전북 완주의 천호성지 가는 길...

서울에서 3시간 정도의 거리로 인하여 쉽게 갈 볼 수 없는 성지인 만큼 한개도 놓치지 않으려는 각오를 갖고

아침 8시 복음화학교를 떠났다.

5호차에 탑승한 우리는 맨 먼저 차량기도와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이번이 두번째 방문이었기에 천호성지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안내할 수 있었다.

가을이 점점 무르익어가는 10월24일...

가을 들판은 온통 노란색으로 빛을 발하고 오전에 비가 내릴거라는 전라도 지방의 예보에

조금은 걱정이었지만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은 우리들이 가는 길에

오던 비도 그쳤다는 신부님의 말씀이 옳고도 좋을시고...

 

공동체별로 순교 묘소에 기도하고

맛있는 점심...그리고 천호공소 방문...십자가의 길....미사...

다리실 마을 곳곳에 예수님상과 성모상이 보이는 광경이 참 좋았다.

높은 산에도 보이고....들에도 보이고...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의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다.

천호공소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천호산 역시 이름 그대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甁)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박해)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1866년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순교자가 묻혀 계시며,

이 분들과 함께 순교한 수 많은 분들이 천호산에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묻혀 계시다.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

곧 육신이며 이름이며 살아온 일생의 내력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 채 바친 것이다.

 천호산의 나무와 풀들은 이름과 종적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의 시신의 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생명들이다.

 

성지의 조성과정:

천호성지와 그 주변의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서

조선조 때 나라에서 고흥 유씨 문에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사는 신도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중 1909년 뜻하지 않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서 공소신도들은 생활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941년경 150 정보 중에 서 순교자들의 묘와 종적은 알 수 없지만,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 되는 땅 75 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땅을 봉헌한 사람들은 목세영(베르몽)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등 8명이며, 이로써 오늘의 성지를 보존하게 된 것 이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년 5월,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그동안 실전(失傳)되어 왔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치명한 후 합동으로 묻혀 있던 여덟 분의 유해와 천호산 기슭에서 두 분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천호산에는 지금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발굴하지 못하는 많은 순교자들이 계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를 개발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전주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세웠다.

이곳은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어서

그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