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셉 신학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1836년 이 땅에 들어오자 마자 신학생들을 뽑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 신학 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은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국경 통괴의 어려움, 기후 및 음식 문제, 고국과의 연락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 땅에 신학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1850년 당시 교우집만 70여집이 되었을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생활하였던 이곳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교무장 직무대행인 메스트르 신부에 의해 신학교가 세워진 것이다.
매스트로 신부는 1843년부터 배론에 들어와 살던 장주기 요셉의 초가를 빌려 1855년 초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신학교의 이름은 1961년 10월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서 "성 요셉 신학교"로 명명 되었다.
학교의 책임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프리티에 신부(1856.8~1866.3)신부와 프티니콜라(1862~1866.3) 신부였다.
당시 신학생은 설립 직후 6명, 1859년에 7명, 1863년는 10명이었는데
병인박해로(1866년)로 말미암아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됨으로로써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황사영의 토굴과 백서
산비탈을 이용하여 1m반 정도의 입구를 가진 토굴을 김귀동과 김한빈이 팠는데
토굴 앞에는 출입구를 은폐하기 위해 옹기를 겹겹히 쌓아 옹기 저장고를 가장하였으며,
그 넓이는 적어도 어른 두사람이 누워서 잘 수 있는 넓이였다.
황사영과 함께 체포 압수된 백서는 고금천하에 둘고 없는 흉악한 글이라고 하여
의금부 창고에 보관하여 왔고, 1894년경 정부가 오랜 문서들을 정리 소각하는 과정에서
교구장 뮈텔 주교께 전달되었다.
1925년 7월 5일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에 교구장 뮈텔 주교는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봉정하였다.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cm, 세로는 일정치 않으나
작게는 39.1cm~40cm이고 122줄 13,384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하게 써진 것이다.
황사영은 자기 이름을 숨기고 황심 토마스 이름을 썼는데 이는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주교와 신부들을 많이 알고 있으므로 신임을 더 받을 것이라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백서의 내용은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 과정과 순교자들의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그리고 관면 요청과 마지막 인삿말로 되어 있다.
성직자 묘소
겟세마니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최양업 토마스 상과 묘소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1821년 3월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836년 김 대건,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가서 신학 교육을 받고 ,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 수품되었다.
귀국 후 12년 동안의 사목 활동은 주로 교우촌 신자들을 위한 사목 순방이었다.
1850년 1월 부터 1861년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산간벽지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역만을 담당하였다.
교리공부와 신앙을 목돋우기 위해 한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한글 번역(셩 교리문답, 텬쥬셩교공과)과 천주가사(선죵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사향가 등)의
저술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최양업 신부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삼위이신 하느님 안에서 긴밀한 사랑과 일치를 이루며 깊은 내적 삶을 사셨다.
1861년 6월 15일 경상도 전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중 과로로 말미암아 문경에서 선종하였고,
그해 11월경 교구장 베르뇌 주교에 의해 당시 신학교가 있었던 이곳 배론에서 묻히게 되었다.
성요셉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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