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청도

[충남/공주]공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

여울가 2012. 2. 3. 15:00

친구들과 공산성에 올랐다.

봄이 저만치서 오고 있는 듯한 따스한 날씨에

산성 위를 걷기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적답사에 왔을 때는 눈에 보이지도 않던 아름다움들이

친구들과 함께하니 완벽하게 느껴진다.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

 

 

 

 

 

 

 

 

 

 

 

 

 

 

 

 

 

 

 

 

 

 

 

성곽위를 걷는 맛이 참 특별나다...

펼쳐지는 풍경이 너무 멋지기에...

 

                                         만하루와 연지 그리고 강건너 공주시

 

 

 

 

 이 연지는 인공적으로 만든 연못인데 여인의 하체를 연상케 한다고...

어느 쪽에서 봐야 하는지...아무리 봐도 아닌데...

 

 

 

 

 

 

 

 

 

 

“인조가 이름 붙인 ‘인절미’”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을 나선 인조가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날 때

임씨라는 농부가 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인조는 콩고물을 묻힌 떡을 아주 맛있게 먹고 난 후 처음 먹어보는 떡의 이름이 궁금하여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인조는 임씨가 만든 맛있는 떡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임절미’란 떡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인절미’로 변했다.

“정3품 나무 터에 지은 ‘쌍수정’”
공산성으로 온 인조는 높은 곳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인조는 두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성의 이름도 ‘상수성’으로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그 후 영조 10년(1734)에 관찰사였던 이수항이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인조를 기리는 정자를 짓고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지금의 쌍수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