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영월여행]비운의 왕, 단종이 잠들어 계시는 장릉

여울가 2018. 9. 3. 19:11

#비운의왕, 단종이 잠드신 장릉

 

청령포에서 근거리에 있는 장릉에

가 보기로 했다.

지난달 장릉에 다녀왔는데 다시 가게 되니

안내도 더 잘 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고

하늘도 푸르러 장릉의 초록과 잘

어우러져 멋진 풍경에 감탄들을 하면서...

 

입구에 있는 단종역사관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한양에서 영월 내려오는 7일간의 유배길에 신하가 산머루를

따다가 단종께 바치는 그림)을 감상하고

왕릉 축조 과정을 영상으로 공부했다.

 

단종이 사후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넘게 걸렸다. 

숙종 7년(1681)에 숙종은 그를 일단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뒤 

숙종 24년(1698) 정식으로 복위했고, 묘호를 단종으로 종묘에 부묘했으며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장릉의 능침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특이한 것은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졌다는 점이다. 

풍수가들은 장릉 터를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능역은 홍살문, 정자각, 단종비각, 재실 등을 갖추고 있어 여타 왕릉과 다름없다. 

그러나 장릉은 능침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반 능과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 공간과 다른 형태다.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이렇게 된 것이다.

 

장릉의 상설은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문인석은 있지만 

무인석은 생략되었고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능역이 조성된 숙종 대에는 왕 단종이 아니라 세자 노산군이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 첫 능지 확인 후 숙종 대에 이르러 혼유석과 장명등, 석호, 석양, 망주석 등 

석물을 정비했는데 작고 간단하게 만들어진 후릉을 따랐다. 

명릉 이래 만들어지는 사각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인다.

 

이곳의 산신석은 다른 곳과 달리 위쪽에 예감, 아래쪽에 산신석이 있어 

유일하게 왕과 산신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특히 규모는 작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의 영릉과 더불어 으뜸으로 꼽힌다.

 

영조 대에 제향 공간을 만들며 정자각과 수복방 등을 설치했고, 

정조 15년(1791) 왕명으로 장릉 밑에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차려놓는

 배식단, 장판옥, 배견정, 충신각 등을 설치했다.

 

배견정, 장판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따라다닌다.

단종이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단종의 영혼은 불교의 환생 논리에 의해 

두견새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종의 유배 시 따라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에 있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의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을 하고 시중을 들었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은 

이 이야기를 듣고 뜻을 기려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고,

 뒤편 바위에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

 

또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32명, 조사 186명, 환자군노 44명, 여인 6명 등 총 268명의 위패를 모셔 

그들을 위로했는데 이 건물이 '장판옥'이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영월에서 가장 큰 문화 행사를 지냈는데, 

1967년부터 단종제로 이름이 바뀌었고 이들의 제사도 지낸다.

 

장릉 주변에는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 죽음을 당한 사육신과 

대의에 따라 절개를 지킨 4명의 충신을 포함해 10충신의 위패를 모신 창절사가 있고, 

영흥리 일대에는 단종이 사망하자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여섯 시녀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민충사와 영모전 등이 있다.

 

#영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