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일 저런일/마음의 양식

내 코가 석자_오비삼척(吾鼻三尺)

여울가 2024. 11. 10. 11:41

오늘 아침 미사 중에 신부님께
들은 '방이설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찾아보게 되었다.

내 사정이 급하고 어려워서 남을 돌볼 여유가 없음을 비유할 때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을 씁니다.  그런데 이때의 코가 어떤 코를 말하는지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머리’라는 말이 두상(頭相)과 두발(頭髮)의 뜻을 함께 갖고 있는 다의어(多義語)이듯이 ‘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소리만 가지고는 신체기관인 코를 말하는 건지, 아니면 코에서 흘러나오는 콧물을 말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콧날이 길어도 문제고 콧물이 길게 흘러내려도 문제일 겁니다.
더구나 한 자가 약 30.3cm이므로 석 자라고 했으니 무려 90cm가 넘는 길이입니다. 말의 재미를 높이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을 한 표현이라고는 해도 그런 경우를 당하면 얼마나 곤란하고 난처할까요?
콧대로 해석하든 콧물로 해석하든 뜻 자체를 전달하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해석을 내리기 위한 노력을 회피해서는 안 되겠지요.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의 유래에 대해 널리 퍼져 있는 내용은 신라시대의 방이설화에서 왔다는 설입니다.
방이설화는 흔히 고전소설인 흥부전의 근원설화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시대에 두 형제가 살았는데 흥부전과는 반대로 형은 가난하고 아우는 매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자인 아우가 가난한 형을 괄시하던 중 농사를 짓기 위해 씨앗을 얻으러 간 형에게 삶은 씨앗을 줍니다.

그것도 모르고 씨앗을 뿌렸는데, 다 죽고 한 그루만 살아서 나중에 한 자가 넘는 이삭이 달립니다. 이 진기한 이삭을 새가 와서 잘라 물고 날아가자 형이 그 새를 쫓다가 날이 저물어 산 속에서 밤을 새게 됩니다.

그러던 중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나 방망이를 두드려서 술과 음식을 나오게 한 다음 실컷 먹고 떠들다 사라집니다.

아이들이 놓고 간 방망이를 가지고 온 형은 부자가 되고, 그 말을 들은 동생은 자신도 신기한 방망이를 얻으려고 산속에 갔다가 오히려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에게 잡힌 다음 방망이를 훔쳐간 범인으로 몰려 코가 길게 뽑힌 채로 돌아옵니다.

위 설화에서 속담이 비롯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럴 듯한 추론이기는 하나 사실 관계를 증명할 길은 없습니다. 말을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호사가가 그럴 듯하게 갖다 붙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홍만종이 『순오지(旬五志)』라는 책을 펴내면서 당시에 널리 알려진 속담 130여 개를 한자로 번역해서 부록에 실어놓았습니다. 거기에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에 해당하는 ‘오비삼척(吾鼻三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오비체수삼척(吾鼻涕垂三尺)’이 줄어서 된 말로, ‘체(涕)’는 ‘눈물’의 뜻을 지닌 한자입니다. ‘내 코가 석 자’라고 할 때의 코를 신체기관이 아닌 콧물이라고 보았던 것이지요.

코가 길어져서 자신의 처지가 다급하다고 해석하기보다는 길게 흘러내리는 자신의 콧물부터 처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남의 사정을 돌아보기 어렵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에도 좀 더 가깝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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