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정원.
[개설]
광한루원은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이 잘 표현되어 있다.
광한루 전면 동서 양편에 평호(平湖)를 만들어 은하수를 상징하게 하였으며,
못 안에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하는 삼신도(三神島)를 만들어
한 섬에는 대나무를, 또 한 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나머지 한 섬에는 연정(蓮亭)을 지었다.
또 가운데에는 연(蓮) 꽃을 심고 못을 가로지르는 오작교(烏鵲橋)를 놓음으로써
광한루원은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조경이 되었다.
광한루(廣寒樓), 춘향사(春香祠), 오작교, 비석군, 월매집, 연지(蓮池), 그네 놀이터 등이
아름다운 수목(樹木)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 고전 소설 「춘향전」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건립경위]
고려시대에 황감평(黃鑑平)이 고려 때 무인난(武人亂)을 피해 남원에 낙향하여
‘일재(逸齋)’라고 하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변천]
황감평이 지은 일재(逸齋)의 옛터에 후손 황희(黃喜)가 1419년(세종 원년) 광통루(廣通樓)를 세웠다.
1434년(세종 16)에 부사 민여공이 주변을 고치고 새로 누각을 중수하였다.
1444년(세종 26) 정인지가 누각에 올라 승경에 대하여 감탄하고
주위 경치가 월궁(月宮)의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와 흡사하다고 하여 광한루로 고쳐 불렀다.
1461년(세조 7)년 장의국(張義國)은 요천의 물을 끌어다가 누(樓)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커다란 연못을 파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오작교를 가설하였다.
누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구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 원진이 소실된 누각 자리에 작은 누(樓)를 세웠다.
1626년(인조 4) 신흠(申欽)의 아우인 남원부사 신감이 작은 누(樓)를 헐고
그 자리에 원래의 크기로 복원하였다.
영주각은 1792년(정조 16)에 부사 이만길이 세운 것이다.
1855년(철종 6)에는 남원부사 이상억이 광한루 누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호남제일루(湖南第一樓)”라는 현판을 크게 써서 걸었다.
이 현판은 지금은 현관 옆에 걸려 있다.
1877년(고종 14) 광한루 본관이 차츰 북쪽으로 기울어지자 부사 이용준이 익루를 만들었다.
1971년 경역 확장 작업으로 크고 아름답게 단장되었다.
[구성]
광한루원은 관아에서 조성한 것이다. 자연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이용하여
그에 어우러진 건축물을 만들고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특히 광한루원은 신선이 사는 이상향의 세계를 실현하려는 마음으로 조성하였다.
광한루원은 광한루, 오작교, 청허부, 춘향사, 30 비석군, 호석, 영주각, 완월정, 방장정,
연지와 비단 잉어, 호수와 삼신산, 편액 100여 점, 월매집, 그네타기와 널뛰기 놀이터,
대나무 숲과 버드나무와 백일홍 등 여러 다양한 종류의 수목들로 구성되어 있다.
누각에는 분합문을 달아 열어 놓고 지내니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건물이 환하게 뚫린 느낌이 들게 하고 필요할 때만 문을 사용하였다.
누각 정면의 현판은 선조 임금의 사위였던 신흠의 아들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의 글씨이다.
누각 천장과 벽면 가득 실려 있는 편액은 광한루의 또 다른 자랑거리로,
그 내용은 주로 광한루에 올랐을 때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에서 느낀 감회를 표현한 시이다.
광한루원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시와 누정기, 중수기 등으로 200여 수의 시문(詩文)이 있다.
한시를 지은 작가들이 조선시대 전기로부터 중기, 후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가히 조선시대 전체의 한시(漢詩) 문학을 한 곳에서 지켜볼 수 있는 한시문학의 보고(寶庫)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편액으로는 김종직, 정철, 신흠, 백광훈, 이경여, 송대빈 등의 작품이 있다.
누각 앞에 있는 호수는 은하를 상징하도록 꾸미고 하늘의 세계를 연상케 하는 오작교 다리를 놓아
천상옥계(天上玉界)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오작교는 선조 15년(1582) 남원부사 장의국이 삼신산과 더불어 조성하였다.
현재 폭 2.8m, 길이 58m, 네 개의 수로 구멍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홍예(虹蜺) 다리이다.
청허부는 광한루원을 들어가는 정문이다.
1971년 경역을 확장하면서 신축한 건물이다.
달나라 옥경이 광한청허부이므로 옥경에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청허부라 명명하였다.
솟을 삼문에 맞배지붕 형태의 고풍스런 대문이다. 청허부 현판은 김충현(金忠顯)의 글씨이다
춘향사는 광한루원 동쪽 모퉁이에 있는 「춘향전」에 나오는 절개의 여인 성춘향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쌓여 있다.
일제강점기에 남원 사람 이현순이 발의하여 권번 선생이었던 이백삼과 퇴기 최봉선 등이 뜻을 모아 기금을 모았는데,
진주·평양·개성·동래 등 전국 권번을 찾아가 성금을 모금하여 1931년 사당을 건립하고
그해 6월 단오절에 준공식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사당 안의 단아한 자태의 춘향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원래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린 것이 있고, 나중에 김은호가 그린 것을 현준호가 기증하였는데,
그것이 한국전쟁 당시 훼손되었다.
1962년 정부내각수반 송요찬이 김은호가 그린 그림을 기증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춘향사 옆에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30기의 비석은 두 줄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전라도나 남원에 수령이나 어사로 봉직하여 선정을 베풀거나 남원 지역민에게
덕을 베푼 사람들에 대한 선정비와 선덕비들이다.
이 비석은 본래 동헌이나 부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비석의 보존과 도시 미화의 일환으로 광한루원 안에 옮겨 보존하게 되었다.
호석(虎石)은 호랑이 모양의 돌조각이다.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서문 방향에 위치해 있다.
전라도관찰사 이서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한다.
전언에 의하면 남원시 수지면 고평리 속칭 개머리산(견두산)에 들개떼들이 인명을 해치고
큰 화재가 빈발하여 괴변이 잦았다.
이서구는 남원부사에게 명하여 개는 호랑이로 제압해야 한다고 말하고
호석을 만들어 견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
광한루 경역이 확장되기 이전에 시장자리였는데 그곳에 호석이 있었으므로
그곳을 한 때 호석거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완월정은 1971년 경역 확장 당시에 수중(水中)에 세워진 정자(丁字) 집 모양의 누각이다.
영주각은 1794년(정조 18)에 광한루원 안에 세운 누각으로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의 이름을 따서 영주각이라 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마루와 계단만 있다.
방장정은 1963년 당시 남원군수 이화익의 창안으로 세웠는데, 육각정 형태의 정자이다.
삼신산,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의 세 산에 조응하여
완월정, 영주각, 방장정을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월매집은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자주 등장하는 집이다.
비교적 최근에 만든 집으로, 문간채를 들어서면 마당을 지나 세워진 초가삼간 집이다.
월매집 앞쪽에는 그네와 널뛰기판이 있다.
[현황]
해마다 음력 5월 5일 단오절에는 광한루원에서 춘향제가 열린다.
남원시에서 관리사무소를 두고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를 징수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디지털남원문화대전 홈페이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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