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가톨릭 성지순례(국내)

[충남/공주]거룩한 땅, 공주 황새바위 순교성지

여울가 2012. 2. 3. 14:43

초창기 한국 천주교회사는 순탄치 않았다.

한 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질곡의 세월을 겪게 된다.

1785년 을사박해를 시작으로 100년여의 세월동안 박해를 받게 되면서 많은 사람이 순교하게 된다.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라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당파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였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한국의 전통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죽은 이의 혼령(귀신)을 부르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는 의식과

혼령이 제사 음식을 먹고 간다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사 문제가 발생하자 남인들로 이루어진 파벌(시파, 時派)을 적대시하던 벽파(僻派)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려고 하였다.

1801년,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지교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여 300여명이 순교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4대 박해 중의 하나인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4대 박해'는 신유박해를 비롯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4대 박해' 중에서도 신유박해와 병인박해가 가장 규모가 크고 신자들의 희생도 컸다.

병오박해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그 파장이 컸다.

그러나 이 박해 외에도 을사박해, 신해박해, 정해박해, 을해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1876년 개항 때까지 숱한 박해가 계속 이어졌다.

공주는 일찍부터 죄수들을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고 있었던

관찰사(후에 충청감사로 바뀜)와 감영이 있었다.

충청도 각 지방 뿐 아니라 때로는 타 지역에서 잡힌 소위 사학(천주학)죄인들이

자기 지방에서 제 일차적으로 심문과 고문을 받고도 배교를 하지 않았을 때,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또다시 지독한 고문과 회유로 배교할 것을 강요당하고,

그래도 배교를 포기하지 않으면 감사의 명에 떠라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공주는 가톨릭교단의 성지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곳이 "황새바위 성지"이다.

 

"황새바위 성지"라는 지명의 연원은

공주 감영에서 사형이 결정되면 죄수들은 "황새바위"에서 처형당하게 되는데,

형장 근처 바위 위에 소나무가 밑으로 늘어진 곳에 황새가 서식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일명 "항쇄바위"하는 말도 전하는데 이는 죄인들이 목에 항쇄(목에 씌우는 칼)를 차고

바위 앞에 끌려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충청도 내포지방의 사도라 불리는

단원 이존창 루도비꼬(1801년 4월 10일 순교)와 성인 손자선 토마스(1866년 순교)를 비롯하여

기록된 숫자만도 248위가 되며, 그 외에도 무명 순교자가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새바위 순교자 248위 기록을 보면 이곳 공주지역이 1798년 순교자 이도기 바오로로부터

1879년에 옥사한 손 카타리나까지 100여년의 한국 천주교 박해역사 시초부터 끝까지

순교가 있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형이 집행될 때에는 건너편에 위치해 있는 공산성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구경하였고,

참수된 머리는 나무에 매달아 천주학을 경계케 했으며 처형된 시체는 부근 언덕에 매장하거나

그대로 밭에 두어 비가 올 때는 피와 함께 순교자들의 시체가 제민천으로 쓸려가기도 하였다 한다.

 

1798년 6월 12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이도기 바오로의 일화 한 토막이다.

순교를 앞둔 한 동료가 겁이 나 벌벌 떨면서 "참말이지 나는 어떻게 형벌을 참아낼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지요?" 하고 물을 때

순교자 이도기 바오로는 "나도 고문의 형벌이 몹시 괴롭소. 그러나 천당을 헐값으로 살 수 있나.

고통은 영원한 행복을 살 수 있는 돈일세. 용기를 내어 얼마동안만 더 고통을 참아 받도록 하게."라고 답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면 가장 혹독한 형별이라도 참아 받기가 쉽지만

만일 주님께서 나를 버리시면 아무리 작은 고통이라도 견디지 못할 것이오.

예수 마리아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니 나는 아무 것도 무섭지 않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11시 주일미사를 봉헌하기 전에

오랜 세월 성당을 나가지 않고 쉬고 있던 친구들 4명이

고해 성사를 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나의 기도였는데 그게 이루어지는 순간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응답해 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12개의 선돌이 서 있는데

이 돌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핏자국처럼 보이는 돌도 있어 사람을 매달았던 돌인지...

아님 12개의 돌이 12사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형틀로 사용되었던 돌...지금까지도 그 핏자국이 선명하게 물들어져 있다.

 

 

 

   예수님의 무덤 모형 경당 - 내부에는 이곳에서 순교한 337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