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서울

[서울/성북}성북동 문학기행 제8처, 소설같은 사연을 지닌 길상사, 길상선원..

여울가 2015. 6. 6. 12:13

 

시인 백석과 대원각의 기생 김영한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상사는 원래

제 3공화국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 었던 대원각이었다.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기생 김영한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사찰이 되었다.

 

*기생 김영한

열여섯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은 춤 노래 문학이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첫눈에 사랑을 하게 되었다.

시인 백석은 영어교사를 그만하고 둘은 3년의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킨다.

이런 식으로 강제 결혼을 하고 다시 도망치기를 세 차례,

그때마다 김영한을 찾아오지만, 결국 남북이 분단되어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만다.

백석은 북한 재북작가로,김영한은 대원각으로 많은 돈을 모았다.

이렇게 모은 평생 재산 중 현금 2억원은 백석문화상으로 기부하고

대원각의 모든 전각과 땅은 법정스님께 시주하게 되었다.

당시 1000억원이 넘는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꺼야."라고 대답했다.

 

 

*요정 대원각과 법정스님

 

박정희 전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던 대원각은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찾던 최고급 요정으로 숱한 여인들의 애환이,

당시 절대권력자들과 한때를 풍미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의 안주인 김영한이라는 여주인이 있었다.

1997년 이곳 안주인 김영한은 당시 불교계에 연을 맺고 있던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듣고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이루어진 대원각은

당시시세로도 1000억이 넘는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무소유를 말씀하시며 받지 않으려는 법정스님과 수년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결국 법정스님은 대원각을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김영한 할머니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이름을 따서 이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정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길상화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 죽으면 화장해 아얀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유언을하고

이튿날인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 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그해 49재를 지내고 그의 유언대로 흰눈이 쌓인 날 길상사 경내에 스님들이 그의 재를 뿌려주었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은데 개원법회때는

 역시 고인이되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엔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길상화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휴먼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남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약한 신랑에게 팔려갔다.

우물가에서 빨래를하는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끝내,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위해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가무와 궁중무를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기생 진향(眞香)은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찾아가지만 면회를 거정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천재 시인 白石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썼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 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때까지 이별은 없을것"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여자와 결혼을 시키게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 될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 거절하자

백석은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두사람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 뒤여서 만날수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이듬 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