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런 그리스도인/한국124위 순교복자 열전

124위 복자 열전(121), 박 프란치스코

여울가 2017. 6. 28. 12:08

 제121위 박 프란치스코


121위 박경진 프란치스코(Francis)

축일 : 5월 29일

성인구분 : 복자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1835-1868년

같은이름 : 박 프란치스코, 박프란치스코, 방지거,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1835년에 태어난 박경진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장성한 다음

오(吳) 마르가리타와 혼인하여 충청도 청주에서 살았다.

그들 부부는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안전한 곳을 찾아 아들 사 형제를 데리고 진천 절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로 이주하여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절골에서 2년가량 평온하게 생활하면서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1868년에 이르러 박해가 더욱 거세어지면서 다시 위험에 놓이게 되었고,

그해 9월 5일(음력 7월 19일)에는 마침내 경기도의 죽산 포졸들이 절골로 들이닥쳤다.

 

이때 박 프란치스코의 가족은 포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고

산중으로 피신하던 도중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 박 프란치스코의 아내 오 마르가리타는

어린 자식을 업고 산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많은 매를 맞았다.

 

한편 가족의 사정이 궁금해진 박 프란치스코는,

동정을 살피려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그 동네의 한 비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비신자는 박 프란치스코에게 ‘내 집에 자면서 동정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며

안심을 시키고는 밤중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포졸들에게 박 프란치스코를 밀고하였다.

 

박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체포되어 아내 오 마르가리타와 함께 죽산으로 끌려갔다.

 박 프란치스코는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동생인

 박 필립보와 맏아들 박 안토니오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특히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가 들어 있었다.

 

“어린 조카들을 잘 보살피면서 진정으로 천주님을 공경하고,

 천주님께서 안배하시는 대로 순명하여 나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여라.”

 

이 편지는 집안에 남아 있던 성물과 함께 박해 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박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이후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하게 신앙을 지켰다.

그런 다음 186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죽산에서 함께 순교하였으니,

당시 박경진 프란치스코의 나이는 33세였다.

 

박경진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