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충신 충의공 엄흥도의 묘소

여울가 2020. 9. 28. 23:06

충신 충의공(忠毅公) 엄흥도의 묘소

영월 엄씨 시조인 엄임의(嚴林義)의 12대 손으로
엄한서(嚴漢著)와 원주 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엄임의는 중국 한나라 때 대학자인 엄자릉(嚴子陵)의 후예로 당나라 때 음악을 전파하는 사신인 파락사(坡樂使)로 임명되어
부사(副使) 신경(辛鏡)과 함께 신라로 왔다.

그는 고려 때 원외랑(員外郞) 벼슬을 역임하다가
신경과 함께 산수가 빼어난 영월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정착하였다.
그 후 두 사람은 결의 형제를 맺게 되었으며,
엄씨들은 하송리 은행나무 근처에 행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영월 신씨들은 영흥리 물거리 부근에 이화정을 세운 채 두 집안은 후손 대대로 의좋게 살아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조선 6대 임금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물러나 있다가 영월 청령포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단종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과 결혼 한 후,
정순 왕후로 책봉된 부인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결국 일년 반만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단종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 어득해(魚得海)와
군자감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 그리고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 등
군사 50명의 호송 속에 서울 광나루에 있는 화양정을 출발하여
일주일만에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도착하였다.

청령포는 3면이 푸른 강으로 둘러싸이고
칼날 같은 산들이 얽히고 설킨 천혜의 유배지로
밤이면 피를 토하듯이 처절하게 울부짖는 두견새의 울음소리와
밤새도록 끊일 줄 모르고 흐르는 포구의 거친 물소리만 들려오는 첩첩산중이다.
이곳에서의 어린 임금의 귀양생활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였다.

정순 왕후는 매일 아침 유배지인 동쪽의 영월을 향하여 통곡하였고,
단종은 한양 땅이 바라보이는 층암절벽인 ‘노산대(魯山臺)’에 오를 때마다
정순 왕후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슬픔을 달래기 위해
주위에 흐트러져 있는 돌을 주워 ‘망향탑(望鄕塔)’을 쌓았는데,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노산대와 망향탑’에 얽힌 두 사람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 눈시울을 적시곤 한다.

이 때 영월 호장(戶長)으로, 의(義)와 불의(不義)를 구별할 줄 알고
충의를 아는 엄흥도는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를 찾아
어린 임금의 안위(安危)를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월에는 사나흘간이나 장대 같은 빗줄기가 떨어지면서
단종의 유배지로 가는 뱃길마저 끊어지고 큰 물난리가 났다.
이에 단종은
영월동헌의 객사(客舍)인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관풍헌에서 생활하던 어린 단종은
저녁 노을이 물들 때면 홀로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부인 정순 왕후가 있는 한양을 바라보며 애절한 시를 읊었다.

그리고 충신 엄흥도는 이에 답하여
다음과 같은 차운시(次韻詩)를 지어서 단종에게 바쳤다.

한번 영월에 오시더니 환궁치 못하시옵고
드디어 흥도로 하여금 두려운 가운데 돌보시게 하였도다.

작은 벼슬아치 육순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거늘
대왕은 17세의 운이 어찌 그리 궁하신지

높이 뜬 하늘에는 밤마다 마음의 별이 붉고
위태로운 땅에는 해마다 눈물비가 붉도다.

힘없는 벼슬아치 의를 붙들고 일어서서
홀로 능히 이 일을 왕께 말씀드리려 하노라.

애닯은 심정과 한을 담은 자규시와,
엄흥도의 시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첩첩산중인 영월에서
유배생활을 한지 얼마 되지않아
경상도 순흥에서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었다.
이 때 신숙주와 정인지, 한명회 등은
단종과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릴것을 주청하였다.

이에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단종은 동강에 버려졌으나,
역적의 시신에 손을 대면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 때문에
그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의협심이 강한 엄흥도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들 3형제와 함께 미리 준비한 관을 지게에 지고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현재 장릉)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가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간곡히 말렸으나,
불의(不義)와 의(義)를 구별할 줄 알고 의협심이 강한 엄흥도는
“옳은 일을 하다가 그 어떠한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
(爲善被禍吾所甘心)”라는 말을 남기고 단종의 시신을거두었다.
이에 엄씨 문중에서는
그가 남긴 이 유훈(遺訓)을 이어 받아, 그의 충의정신을 높이 받들고 있다.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지게에 지고 영월 엄씨들의 선산으로 향하였다.
이 때가 음력 10월 하순이므로
동을지산의 푸른 다복솔 가지 위에는 이미 함박눈이 쌓였고,
살을 에는 듯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엄흥도는 잠깐 쉴만한 장소를 찾고 있는데,
언덕 소나무 밑에 숨어있던 노루 한 마리가 사람들의 인기척에 놀라 달아나서
그 자리를 보니 눈이 녹아 있었다.
엄충신은 단종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을 그 곳에 놓은 채
땀을 닦으면서 긴 호흡을 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에띄지 않는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관이 얹혀 있는 지게가 움직이지않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아! 이곳이 명당인가 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노루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다 단종의 시신을 몰래 장사지냈다.

그 후 엄흥도는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그곳에다 단을 쌓고 초혼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지금도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는 엄흥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동강에 버려진 단종을 장사지낸 그의 후손들은 주위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먼 곳으로 도망을 간 후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갔다.

그 후, 정조 때는 조정에서 엄흥도의 충성을 높이사서
강원도 관찰사로 하여금 제물을 대주어 엄충신의 묘를 단장하고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현재 그의 묘는 영월읍 팔괴리(八溪里)에 있는데,
후손들에 의해서 잘 관리되고 있다.

단종이 승하한 지 200여 년이 지난 현종 9년(1668)에 참판 여필용(呂必容)이 엄흥도의 복호(復戶)를 주청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건의로 그의 후손들을 등용하였고, 영조 34년(1758)에는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추증하고 영조가 친히 제문을 내려 사육신과 함께 모시도록 하명하였다.

지금도 영월 창절사(彰節祠)와 장릉 경내의 충신각, 문경 의산서원(義山書院), 그리고 경북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의 충절사에서는
엄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삼족지멸의 위협 속에서도
단종의 시신을 장사지낸 엄흥도를 기리기 위하여 영조 2년(1726)에 청주에 정려각이 건립되었고,
영조19년(1743)에는 엄흥도에게 공조 참의 벼슬과 제물을 함께 내렸다.

그 후, 엄 충신의 정려각은 영조 35년(1759)에 그의 고향인 영월로 옮겼으나,
그 후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허물어지자
1970년에 지금의 위치인 장릉 화소 안으로 옮겨 세우고 그 앞에다 홍살문을 세웠다.
충의공 엄흥도의 충성과 업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 삼족을 멸한다는 위협속에서도
올곧은 충의정신 하나로 단종을 장사지낸 엄충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나라에서는 그의 충성과 의로운 행동에 보답하기 위하여 큰 벼슬과 시호를 내렸다.

단종의 시신을 거둔 충의공 엄흥도 묘소 참배
https://youtu.be/QiQ_Nlm-r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