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라는 말을 들으면 의자와, 삼천궁녀, 그리고 정림사지오층석탑이 떠오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재작년 아이들을 제리고 부여 고적답사를 다녀 왔는데
그때 정림사지오층석탑이 공사중이어서 볼 수 가 없었다.
이번에 알고보니 공사를 한것이 아니라 불에 탔던 그을음을 좀 벗겨내 보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림사지가 불탔을 때의 그을음은 벗겨낼 수 없었다고 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1,500년을 꿋꿋하게 지켜오면서
패망한 나라의 슬픔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들고 서 있었다.
백제가 서기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을 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승전을 알리는
'대당평제국비명'이라는 글이 탑신 초층에 새겼고
임진왜란 때는 불에 타서 그을렸으며
일본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사리를 꺼내기 위해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윗돌이 떨어져 탑의 일부분이 깨어져 나가는 비운을 겪었다.
비록 백제의 후손인 우리들에게는 치욕스런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이지만
그 당시 절을 모두 불태우면서도 오층석탑만을 남겨둔 것은 자기의 공적을 새겨놓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석탑은 목조탑에서 석조탑으로 넘어가는 첫양식으로써
탑의 가장자리가 목조탑처럼 곡선으로 위로 치켜 세워졌으며
부드럽고 온화한 백제문화 이미지가 그대로 녹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더불어 삼국시대 석탑의 처음 모습을 밝혀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소정방의 승전보를 알리는 글
탔던 그을음과 깨진 부분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여기서 바라보는 오층석탑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오층석탑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한다.(정말 그러나??)
#정림사지 석불좌상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인데 머리 부분은 연자방아 돌을 사용한 것이라고 해설사님이 설명했다.
구멍을 메운 흔적이 역역하게 보인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이다.
정림사는 이 절의 고려시대 이름인데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의 명문을 통하여 정림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여행길에서 > 충청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충남/부여]백제의 고도 국립부여박물관- 야외 유물 (0) | 2010.05.20 |
---|---|
[충남/부여]오천용사들의 혼이 잠든 백제오천결사대출정상 (0) | 2010.05.15 |
[충남/부여]지자체와 상생하는 부여청소년수련원 (0) | 2010.05.15 |
사물놀이 한마당-부여군 충남국악단 사물놀이단 (0) | 2010.05.15 |
[충남/부여]소리와 몸짓, 꿈과 미래가 있는 부여군 국악의 전당 (0) | 2010.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