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도 낮에는 높은 기온을 나타낸다. 섭씨33도 이상...
그러나 밤이 되면 선선해지는 날씨때문인지 호텔에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다.
당연히 우리나라와 같은 열대야도 없어서 잠을 매우 잘 잤다.
이른 아침에 호텔 주변의 마을에 산책을 나갔다.
동네 입구에 커다란 과일 나무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익히고 있다.
야생화가 가득 피어난 풀밭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그림같은 풍경의 아침이다.
집의 벽을 멋드러지게 칸을 나눠서 멋지게 색칠을 해 놓았고,
집 베란다에는 페츄니아 화분을 놓아두어 보는 사람들의 눈을 행복하게 해 준다.
우리들의 첫 여행지는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다.
베를린은 베아를린이 어원인데 이는 아기곰이란 뜻이란다.
그래서 베를린의 상징은 아기곰이다.
고속도로의 길옆에 아기곰의 동상이 가끔씩 서 있는 것를 볼 수 있다.
베를린의 깃발에는 곰돌이가 그려져 있다.
처음 베를린을 독일의 일부로 만든 사람은 알브레히트 곰 백작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도시의 이름을 곰-베어(Bear)-베를린(Berlin)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베를린은 약3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동서로 20km, 남북으로 30km로 서울의 1.4배 크기이며 뉴욕, 런던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독일은 1600년대부터 유럽에서 부강한 나라로 떠오르는데
전쟁을 좋아하고 침략적 근성의 이미지가 많아
부국강병 정책으로 왕직속의 군대가 있던 나라이다.
전통을 중시하며 보수적인 사람들..근면하고 검소하게 사는 문화를 배워야 할 민족...
동부 독일의 프로이센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아
1600년~1700년 프리드리히 2세 때부터 부강하였고,
세계의 강국들이 식민지를 넓히고 있던 때라서 영국, 프랑스와 더불어
모로코나 발칸 등지에서 충돌을 빚기도 했다.
독일은 남한의 3.5배 넓이로 인구는 8,200만명이고
거의 대부분이 게르만족이다.
지역별 주가 모인 연방공화국으로 현 대통령은 동독 출신이라고 한다.
산은 거의 없고 숲이 많아서 임산자원이 풍부하여
목재가공업, 펄프, 제지 산업이 발달하였고
낙농, 목축업,유제품가공업도 발달하였다.
특히 독일은 주방용품인 철강산업이 유명한데다가
3차 산업인 금융업도 발달하여 유명한 유럽중앙은행과 보험회사 알리안츠도 있다.
베를린 시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69m의 높이를 자랑하는 전승기념탑이다.
이 탑은 프로이센이 덴마크(1864년), 오스트리아(1866년), 프랑스(1870~1871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873년 9월 2일 화합의 상징물로 완공하였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12m 높이의 승리의 빅토리아 여신상이 서 있다.
이 탑의 원주 안에는 2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어 53m 높이의 플랫홈까지 올라갈 수 있다.
전승탑과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길에 동서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렸던 브란덴부르크문이 우뚝 서 있다.
이 문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갈라놓은 베를린장벽에 서 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이 통일하던 날
이 브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에서 독일통일기념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이 문은 유럽을 제패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의뢰하여
평화를 나타내고자 만든 개선문이었다.
그러나 반어적으로 그 후 동독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단단한 베를린 장벽이라는 고리가 되어 버려 장기간 폐쇄적인 문이었다.
동, 서독의 분단 시기에는 동서 분할의 상징이 되었고,
동서 베를린을 나누던 기점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제는 통일을 나타내며 웅장하게 베를린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1789년 랑한스에 의해 건축되어진 것으로 파르테논 신전의 프로필라이아을 모방한 것이다.
즉, 18세기 말에 세워진 도리아 풍의 개선문으로,
지난 날의 수도인 베를린을 상징하고 있다.
문은 통독 이전의 동베를린령 내에 있다.
그 후 1973년에는 샤도우가 만든 이륜 사두 마차를 위에다가 다시 세웠다.
도리아식 기둥 12개가 떠 받치고 있는 베를린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온 세계의 눈길을 모았던 프러시아 군국시대의 개선문이다.
옥상 전차 위의 여신상을 자세히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이 전차는 처음에는 동독을 향하고 있었는데 통일 후에 서독을 향하고 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동독을 향하고 있다고...
이 브란덴부르크 문은 베를린의 현관 역할을 해 왔으며,
타인에 의해 약 50여 년 동안 비극의 상징으로 있다가
1989년 비로소 11월 9일 민주화의 물결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재는 새로운 통합 자체로서 떠 오른 문이다.
감격적인 통일의 순간,많은 베를린 사람들이 이곳에서 집합하였었다.
예전에는 이곳에 가려면 허락을 받아야만 했지만,
지금은 유명한 관광 명소의 하나로 카메라를 손에 든 외국인들,
구동독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움 그 자체의 현실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곳 근처에는 장사꾼들이 많으며,베를린 장벽의 조각이나 군복,펀치 등을 팔고 있는 노점들이 줄지어 있다.
심지어 대부분 낡고 지저분하긴 하지만,벳지,독일군 모자,돌 같은 기념품 까지도 팔고 있다.
이 브란덴부르크 문은 많은 이들이 그곳을 기어 올라 가거나 낙서를 해서
예전과 같은 위엄은 많이 사라졌지만,다시 새로이 복원시켜서 또 다시 훌륭한 모습을 되찾아
그문 아래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는방법 : 베를린 시내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과 '6월 17일 거리'(Strasse des 17,Juni)에 위치하고 있다.)
브란덴 부르크 문의 동베를린 쪽으로는 각국의 대사관과 이름난 호텔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동베를린쪽에 시민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보리수 그늘 아래서)길도 유명하다.
다시 서베를린쪽으로 길을 건너면
보리수가 양옆으로 늘어선 길을 따라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고
커다란 버블을 만들어 날리는 사람도 있다.
그 길을 5분 정도 걸어가면 국회의사당이 나온다.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간 곳은 베를린 장벽이다.
동,서 베를린은 장벽 이전에는 대내적으로는 서로 왕래가 가능하였으나,
젊은 층이나 고급 인력들이 자꾸 서베를린쪽으로 이동하게 되어 동베를린의 체제 유지를 위해인위적으로 세우게 되었다.
하루 아침에 왕래를 할 수 없게 되자
동베를린 사람들은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장벽을 타고 넘으려다가 총살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후 이 장벽으로 가로막혀서 왕래를 못하다가
통일이 되어 장벽은 허물어졌으나,
베를린을 찾는 많은 여행자가 동서독을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을 보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통일될 당시 다 부셨기 때문에 지금은 베를린 장벽을 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나마 베를린 장벽을 볼 수 있는 곳은 동역 Ostbahnhof 근처와 찰리 검문소 인근이다.
동역 앞에 있는 장벽은 2000년 6월에 복원한 것으로
세계 각국 사람들이 그린 평화를 기원하는 그림과 낙서가 그려져 있고,
한국인이 그린 그림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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