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가톨릭 성지순례(국내)

성지순례로 찾은 강진 다산초당

여울가 2015. 2. 27. 14:13

국토의 남단, 전라남도 강진은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이 유배 생활을 했던 곳으로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이 무려 18년간이나 유배되었던 곳이다.

 

다산은 경기도 양근 마재에서 태어나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1770년대 후반 서학 서적을 접하면서 천주교와 관계를 맺었고,

그 진리에 매료되어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등으로 박해가 거세지자

수차례 배교의 뜻을 밝혔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결국 유배의 길을 떠났다.

강진에서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의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순교의 길을 택한 데 비해

자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으로 그 부끄러움을 표현한 것으로 사료된다.

 

정약용은 이 외딴 초당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고,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온 뒤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굳은 신앙을 보여 주었다.

유배 중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로 보여진다.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며 외부와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았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 복음 전례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 공경가' 와

'聖敎要旨'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들어있다.

다산은 죽기 직전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다산초당은 20분 정도 걸어 올라갈 정도의

산 속에 있다. 초당 옆에 작은 연못을 두었는데 반영이 예뻤다.

초당의 양 옆으로 서암과 동암을 두고 후학을 가르치고 책을 썼다. 구강포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천일각은 절경이고 이 오솔길을 따라서 백련사를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