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전라도

[전남/나주]장래 나주 명소가 될법한 '3917마중'

여울가 2018. 2. 19. 13:04

나주 향교 바로 위에

약간의 언덕배기에 쉬어갈만한

멋진 까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향교길 42-16에 있는 옛 정의관집으로 ‘3917 마중’ 카페...

 

이곳은 1939년 당대 유일한 건축대서사였던 박영만이 건축한 난파고택(정의관집)은 1973년 (재)금하장학회에서 인수 한 뒤 몇 년 동안 사무실로 활용되다가 30년 가까이 빈 집으로 방치된 공간이었다.

 

전주에 사시는 분이 방치된 3천평의 공간과 집들을 복원하여

게스트하우스와 까페로 꾸며놓고

그 이름을 '3917 마중'으로 지었단다.

‘1939년 나주근대를 2017년에 마중하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사장님께서 난파고택에 얽힌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고, 다다미가 깔린

게스트하우스를 안내해 주시는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가옥 자체는 일본식을 가미한 한옥이라고

하셨다.

 

쌀창고를 개조하여 만들었다는

까페에서 직접 담근 자몽차를 마시면서

유리창으로 내려다 보이는 향교의

고풍스런 지붕 기와의 곡선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마당에 금목서와 은목서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목서원'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나주를 찾은 여행객들에게 좋은 쉼터가

될 것 같다.

10월이 되면 꽃을 피운다는 금목서, 은목서의

향기를 꼭 맡아보고 싶다.

 

#난파고택

 

난파고택은 난파 정석진의 큰아들 정우찬이 살던 집터로, 조선시대 지어진 집을 1915년에 재건립했다. 

아버지가 생전에 경영하시던 난파정을 아버지를 기리는 제당으로 재건립해서 그 옆에 집을 짓고 살았다.

 나주 구한말 근대사에 큰 축이었던 인물이 난파 정석진이었다.

 

향리들의 대부 격인 호장 정석진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끌던 동학군을 막아내는 주축으로 활약했다.

 1894년 갑오년 7월 나주 북쪽 금성산 쪽에서 동학군들이 서성문으로 공략해 내려왔다.

 

동학군은 그러나 강력한 관군의 기세에 눌려 수차례의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3천 명의 전사자를 내고 결국 서성문을 포기해야 했다.

전봉준도 12월 순창에서 붙잡혀 나주로 끌려왔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다음 해인 1895년 을미년, 정석진은 일제의 입김에 내려진 단발령에 반발해

본인이 의병의 의병장이 되고야 만다. 

당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와 내정 간섭으로 우리 민족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고조된 데다 단발령마저 내려져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관군에 의해 진압되는 운명이 됐고 참수되는 기구한 운명의 주인공이 됐다. 

동학이라는 엄청난 물결에 휩싸였던 나주는 전라남도의 중심을 광주에 내주어야만 했고,

 동학 혁명 이후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