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런 그리스도인/하느님은 나의 전부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더프의 생애

여울가 2019. 1. 5. 23:03

◎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 프랭크더프의 생애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 프랭크 더프는 시복조사중에 있는 분이다.

 

그의 위대함은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가 전세계 2500개

 

교구 중 거의 모든 교구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프랭크 더프의 생애는 레지오 마리애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레지오가

 

바로 그의 생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레지오의 산역사이기에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레지오의 역사도 아울러 알 수 있다.

 

그의 생애는 크게 다음 다섯 단계로 나눌 수 있겠다.

 

 

 

1. 신체적 성장기 (1889~1911)

 

2. 영적 성장기 (1911~1921)

 

3. 레지오의 초창기 (1921~1931)

 

4. 레지오의 전성기 (1931~1971)

 

5. 생애의 말기 (1971~1980)

 

 

 

여기서는 주로 생애에 관한 주요 저서인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프랭크 더프의 생애』

 

(1985년 안상인 신부옮김 서울:성요셉 출판사 1989년) 와

 

『이 시대의 인물: 프랭크 더프와 레지오 마리애』(1985년 이수현. 문규현신부 공역,

 

인천:성황석두 루가서원.1985년)를 참고 문헌으로 삼았다.

 

1. 신체적 성장기 (1889~1911)

 

1) 그의 가정과 유년시절


 

존 더프와 레티시아 수잔 프레힐은 1888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결혼하였다.

 

둘다 공무원이었으나 레티시아는 결혼 후 공무원직을 그만 두었다.

 

1889년 6월 7일 성령강림 대축일에 그들의 첫아들이 더블린에서 태어났고 이틀 후에

 

프랜시스 마이클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는데 평소에 프랭크라고 불리었다.

 

래티시아는 여섯아이를 더 낳아는데 그 중 둘은 아기때 죽어 가족은 모두 7명이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면서 기도가 습관화되도록 가르쳤고 덕을

 

쌓도록 단련시켰으며 미사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부모는 또한 밤이 늦도록

 

독서를 하곤 하여 프랭크도 유년시절부터 책을 손에 잡았다.

 

10세때에 이미 그는 고전에 속하는 양서들을 읽어 교양을 쌓아 나갔다. 후에 그의

 

영적 성장에 큰 영향을 준 뉴먼 추기경의 저서들도 이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늘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가정이었으나 그가 아직 어릴 때 가정에 큰 풍파가 몰아쳤다

 

부친과 함께 그가 장티푸스로 사경을 헤매게 된 것 이었다 다행히도 둘 다

 

회복이 되었으나 부친은 그 휴유증으로 평생 고생하였다.

 




2) 학창시절과 취직

 

프랭크는 수녀원에서 경영하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다가 가족들이 그 도시의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전학하였다.

 

1899년 그의 나이10세 때에 성령 수도회에서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운영하는

 

블랙록 학교로 다시 전학하고 첫 영성체과 고백을 하였다 그후로 성체는 그의 생애에

 

있어 추진력이 되었다. 그는 비록 키가 큰편은 아니었으나 몸이 튼튼하고 강인하였으며

 

운동을 좋아하였다.

 

육상선수에다가 자전거 경주선수였다 테니스와 크리켓 운동도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12세 때 크리켓 공이 그의 귀 뒷 부분을 강타하여 불행히도 평생을

 

청각장애자로 지내게 된다 그는 학창시절에 공부도 잘하고 5개 국어 즉 아일랜드어.

 

영어.그리스어.라틴어.프랑스어도 잘하였다.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최종 학년 때에는

 

현대 문학 부문에서 1등 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는 18세때에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구해야했다 부친이 건강상의 이유로 이미 은퇴하여 가정 형편이 몹시 궁핍해졌고

 

그가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문의 전통대로 공무원이 되어 농림부에서 근무했으니 그의 명석한 논리적 사고와

 

수학적 두뇌로 인해 재무부로 전근되었다.

 

21세 때 그는 새로운 계산법을 창안해 냄으로써 런던에 초빙받아 재무성관리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그결과 그가 창안한 방법이 채택되어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1933년까지 계속 공무원으로서 일하였다.

 

 

 

2. 영적 성장기 (1911~1921)

  

 

1) 빈체시오회 가입

 

1913년 24세때 그는 레지오의 창설에 큰영향을 준 빈체시오 아바오로회에 가입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교리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생애를 180도 전환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직장상사의 권유에 의해 빈첸시오에 가입하게 된다.

 

빈체시오회는 평신도인 프레데릭 오자남(1813~1853)이 빈체시오 드 폴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아 애덕을 실천하고 빈민구제사업을 하기위해 183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이다 그당시는 아일랜드에서는 남성들만이 이 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당시 더블린에서의 가난은 처참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상태에 있었고 굶주림과 불결과 술에 만취된 생활에 만연했다

 

종교적인 생활은 갈수록 냉담해 지고 빈첸시오회의 목표는 극빈자들을 구제해

 

주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이다.

 

 

프랭크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빈첸시오회의 좌우명 이었다


그것은


                                    “너희가 여기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해준 것이다”(마태오25.40) 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었다.

 

그는 현실을 통해 이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

 

모두 안에 예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신비체의 일부였다

 

그는 일생동안 그들의 친구가 됨으로써 그들안에 계신 그리스도께 봉사했다.

 

빈체시오회는 기도와 영적독서로 시작되었다 회의록이 작성되고 활동보고가 있어으며

 

훈화가 따랐다. 이는 훗날 레지오 마리애의 회합순서가 된다

 

프랭크는 빈첸시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열렬한 빈첸시오 회원이 되었다.

 

 


2) 하느님과의 친교

 

프랭크가 영원한 생명을 삶의 목표로 정한 것은 두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즉 영적독서와 봉쇄피정이다.

 

그는 1911년부터 영성 서적들 특히 성인전을 즐겨 읽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성인들의

 

사랑은 그에게 성인이 되고자 하는 원의를 일으켰다. 그는 “성성(聖性)이 이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임을 우리가 일단 받아들이면 그것을 위해 애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빈첸시오회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첫

 

봉쇄피정에 참가 하였다. 그 피정은 예수회 신부가 강론하면서 지도했는데 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그때 피정의 가치와 중요성을 깨닫게 되어 매년 두 차례식 피정을

 

하였다. 그는 24세 때쯤 존재의 밑바닥까지 흔들리는 체험을 하였다 가르멜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한 후 기도하는 동안 갑자기 그가 지닌 신앙이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하느님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이제 그의 인생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단 몇 분간 일어났던 일이었지만 그러한 상태는 지옥과 같았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신앙이란 원래 하느님의 선물이며 인간의 이성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보다 더 깊이 깨닫게 되었다.

 

프랭크는 예수회 신부를 영적 지도신부로 삼아 자주 고해성사도 받고 영적 지도도 받았다.

 

그는 영적 지도자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았다.

 

1915년에 그는 매일 성무일도를 바치기로 결심하였으며 가르멜 제3회에 입회했고 매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소(小)성무일도를 바쳤다.

 

그러다가 후에는 완전한 성무일도를 바쳤다 그가 라틴어로 쓰여진 성무일도에 친숙해지자

 

서두르지 않고도 한 시간 반 안에 충실하게 바칠 수 있었다 .

 

만년에 그는 1917년부터 성무일도를 바치기 시작한 이래 난느 단 한 줄도 빠뜨린 적이없다

 

나는 성무일도를 하느님과의 순수한 친교로 보았다고 말했다.

 



프랭크는 1914년 사순절부터 죽을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례했다.


 

하루의 일과를 영성체로써 시작하는 것은 그에게 자연스런 일이었다 후에 그는 매일

 

두 번씩 미사 참례를 하였다 그는 공무원으로서의 직무에 성실하면서도 점점 더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했고 특히 감실 앞에서의 성체조배에 전념했다.

 

1916년에 그의 처녀작인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가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성성(聖性)과 완덕에 이르는 여러 가지 의견과 방법을 제시하였다.

 

1915년 10월에 프랭크는 처음으로 아일랜드의 북서부에 위치한 락더그 섬에 갔다.

 

그곳은 인적이 없는 황량한 불모지로서 호수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폐허가 된 옛

 

수도원이 있었다. 이 여행은 참회와 고행을 하기로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는데 그곳까지의

 

여행은 길고도 지루했으며 참회와 고행은 퍽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21명을 이끌고

 

그 다음해에도 그곳으로 순례하였다.

 

이 순례는 그의 나이가 74세가 되어 중병으로 더 이상 갈 수 없을 때까지

 

49년간 꾸준히 계속되었다

 

 


3) 가톨릭 조반(朝飯)센터 운영

 

그 당시 더블린의 어느 개신교에서는 극빈자들을 대상으로 개종회관에 조반(朝飯)센터를

 

두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주일 아침식사를 무료로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난한 천주교 신자들이 개신교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크게 우려한 프랭크는 1914년 초 몇 명의 협조자아 함께 조 가벳의 받으면서 개신교

 

개종회관 근처에 무료 급식 가톨릭 조반 센터를 마련하였다.

 

조 가벳은 구두 수선 및 제화공으로서 풍채가 당당한 영국 퇴역 군인이었으며 개척자회

 

회원이었다 이 회는 절대 금주 개척자회라고 불렀는데 1898년 예수회 신부에 의해

 

더블린에서 창설되었다. 이 회의 목표는 기도와 희생을 통해 절대 금주를 장려함으로써

 

예수성심을 흠숭하는 것이었다 프랭크 역시 열렬한 예수 성심 신심가였기에 개척자회에

 

가입하여 2년간의 수련기를 거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군사로서 개척자회의 예수

 

성심 배지를 착용하는 것을 명예로 여겨 죽는 날까지 달고 다녔다.

 

아일랜드의 독립 운동을 위한 부활절 혁명이 일어나자 가벳은 다시 영국군에 입대하면서

 

그의 소유물 중 일부를 프랭크에게 주었다 프랭크는 그것들을 빈체시오 회관인 마이러

 

하우스에 보관했는데 그 중에는 채색된 석고로 만드 성모상이 있었다. 이 성모상은 기적의

 

메달 성모상과 같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상 으로서 후에 레지오의 첫 회합

 

때에 사용될 성모상이었다 부활절 혁명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1916년 4월에

 

일어났는데 독립 전쟁으로 확대되어 1921년까지 5년간 계속되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런던에서 아일랜드의 대표단과 함께 협정체결 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정부 관리였던 프랭크도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보고 작성을 도왔다.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협정은 레지오 창설3개월 후인 1921년 12월에 조인되었다

 

그 후 그는 아일랜드의 최고지도자 개인비서로 1년간 일하기도 하였다.

 

프랭크는 16년간이나 조반 센터를 운영하면서 가톨릭 신자의 개신교 개종 센터 이용을

 

감시함으로써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결국 개신교 개종 센터는 이용자 부족으로

 

문을 닫게 되었던 것이다.

 

 

4) 성모님께 대한 참된 신심


 

어느날 저녁 프랭크는 빈첸시오 회관에서 어떤 강사가

 

『복된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이란 책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프랭크는


저자인 몽포르 루도비코와그 책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고

 

강사의 설명도 흥미를 주지 못해 곧 그 일을 잊어 버렸다.

 

독서를 좋아하는 그가 헌책방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다가 우여히 영어로

 

번역된 그 책을 발견하게 되어 즉시 구입하였다 그런데 내용이 과장되고 비현실적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서 실망하였다 그 당시 빈첸시오 회장으로서 후에 사제 서품을

 

받은 직장상사가 그에게 그책을 다시 읽도록 권유하여 재통독을 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그후에도 두세 번 더 읽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어느날 그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섬광 같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일종의 빛처럼 그 책이 진실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비현실적이고 과장되었다고 여겨지던 내용들이 진리라는 확고한 신념이 생겼다

 

이책에서 내가 지나치다고 여겨던 것들은 사실상 성모님께 대한 내 지식과 이해의

 

부족에서 기인한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마리아께 대한 크나큰 신심을 지니고 있었다 1964년에 교황

 

바오로 6세께 보낸 그의 편지에서 1914년 이래로 5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묵주기도를 바쳤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성모신심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 대한 그의

 

지식이나 이해에 틈이 생겼기에 그는 성모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졋다.

 

그런데 뜻밖의 좋은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 개척자 회원이었던 조가벳이 1919년에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유시킨 멜러리산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그를 데려가게 된 것이다

 

멜러리 수도원은 더블린에서 1백 킬로미터쯤 떨어진 산 위의 봉쇄 수도원이었지만

 

방문객들에게도 수도자들의 기도생활에 참여할 기회를 주었다.

 

프랭크는 시토회 창설자 성 베르나르도를 공경해 왔었다 그래서 레지오 교본에서도

 

이 성인의 말씀을 여러 군데 인용하고 있다.

 

 

수도원의 방문객 접대 수사가 프랭크에게 며칠 묵는 동안 영성 서적을 읽겠느냐

 

물었다 그에게 전기 충격같은 말로 들려 성모님에 관한 책을 청하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요셉 드 콘칠리오 신부가 저술한『마리아의 이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큰 감명을 받았고 자기에게 부족했던 마리아께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책을 3백쪽이나 되는 분량으로서 이미 절판되어

 

있었고 수도원 밖으로 빌려갈 수도 없었기 때문에 며칠 동안 계속 베꼈다.

 

그러는 가운데 그 내용이 자기에게 말씀하고자 했던 것을 훨씬더 생생하게

 

깨닫게 되었다 후에 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즉시 그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가 찾던 것임을 알고 굉장히 흥분했다 그것은 몽포르의 책에서 놓친

 

토대였다 성모마리아에 대한 신학이 여기 있었다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프랭크는 그 수도원에서 며칠 머무는 동안 수도자들을 지켜볼수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거룩하게 보였고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가까이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들의 관상생활을 탄복하고 부러워했지만 결코 그것이 자신의 성소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소명이 성직이나 수도생활이 아니고 그렇다고

 

결혼생활에 있는 것도 아님을 깊이인식했다. 그의 소명은 다른방식의 선교생활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교 소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하는지 확신하지느

 

못했지만 하여간 선교가 자신의 소명임을 확신하였다.

 

조 가벳은 다시 술을 완전히 끊게 되었고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프랭크는 그때부터 매년 여름. 멜러리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5) 레지오 마리애의 예비 모임

 

1917년은 매우 뜻깊은 해였다 그해에 파티마의 성모 발현과 러시아의 공산 혁명이

 

있었으며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인 막시밀리안 콜베에 의해‘성모의 기사회’가

 

조직되었고 레지오 마리애의 예비모임이 시작되었다.

 

그해에 빈첸시오 회원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두 개의 협의회고 나누었다.

 

새 협의회의 명칭은 빠뜨리치안회로서 프랭크가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사도직 활도을 시도하였다 즉 영적으로 방치된 어리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절대 금주 개척자 회원들을 모집하였으며 매일 미사참례와 가정에서의 예수 성심

 

공경을 권면하고 갈색성의를 착용하도록 권장하엿다.

 

그 사업들 중 몇 가지는 여성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빈첸시오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지원자들 중에는 이미 조반 센터 사도직 경험이 있는 여성들도

 

있었다 다양한 활동을 조정하고 감독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관리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프랭크는 나이 많은 뉴질랜드 출신 엘리사벳 커완으로 하여금

  

 

월례회는 대개 주일 오후 네 시 반에 시작하여 여섯 시 삼종기도와 함께 끝마쳤다.

 

월례회 동안 회원들은 활동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교리나 신앙생활의 제반 의문점이나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특히 「복되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프랭크가 그 책 내용을 설명해 주면서 읽어볼 것을 강조하였다.

 

회원들은 관심을갖기는 했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그 책과 몽포르 루도비코의

 

가르침에 대해 토론을 하기위해 별도의 특별모임을 갖기로 하였다

이 특별 모임은 1921년 8월까지 계속되었다.

 

3.레지오의 초창기(1921-1931)

 

 

1)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

 

레지오마리애의 첫 회합은 1921년 성모 성탄축일 전야인 .

 

9월7일 더블린의 빈첸시오 회관인 마이러 하우스에서 개최되었다.

 

레지오 마리애가 출벙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어느주일에 빈첸시오 회원인 매드 머레이가

 

관리기관 모임에서 구호 병원의 부인 병동방문에 대한 활동 보고를 하였다 그의 보고는

 

모든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당시 병원 사도직은 남자 회원들이 맡고 있었다.

 

모임이 끝나고 다과 시간동안 몇몇 여성들이 부인 병동 방문은 여자들이 담당할 것을

 

제안하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래서 여성회원들만 별도로 모집하여 그 다음 수요일저녁에 다시모이기로 하였다

 

그날 저녁이 성모 성탄축일 전야라는 사실은 아무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1921년 9월7일 수요일 저녁 여덟시에 15명이 모여 첫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영적지도자 토허신부와 프랭크 더프 및 13명의 여성들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20대의 젊은 층이었다 .그런데 방에 들어섰으때 프랭크는 횐 보가 깔려있는

 

탁자위에 조 가벳이 자기에게 남겨준 ‘원죄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성상’ 놓여 있고

 

양쪽으로는 두개의 꽃병과 불을 켠 두 개의 촛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에 수녀원에

 

입회한 앨리스 키오프의 영감으로 꾸며진 것임을 알게되었다 .

 

오늘날 어느 레지오 회합에서나 그와 똑같은 차림을 볼 수 있다.

 

프랭크는 그처럼 분위기가 잘 잡힌 조촐한 제대를 보고 단원들이 성모님이 초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모님이 자기들을 초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후에 그는 레지오가 초자연적이고 마리아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의 정신으로 조촐하게

 

창설되었음을 상기하면서 “레지오는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생겨난 마리아의

 

정신이다” 라고 하였다.

 

 


레지오의 첫회합에서 단원들이 맨처음에 함께한 행동은 빈체시오회합 순서대로 무릎을

 

끓고 성령께 대한 호도와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이었다 그다음으로 영적 독서를 한 후 새로

 

생겨난 이 모임의 진로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대화하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을 모색하였다 결의 사항으로 매주 회합을 갖기로 하고 프랭크 외에는 남서을

 

입단시키지 않으며 빈첸시오회의 고유 활동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영적인 활동만을 하기로

 

하였다 토허 신부가 첫 훈화를 했는데 그리스도의 신비체 교리에 대해 간단 명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최초의 활동으로서 더블린 병원의 암병동을 두 사람씩 짝지어서

 

방문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레지오 마리애 회합의 원형이 되었다“

 

처음에 이 새로운 단체의 이름은 ‘자비의 모후회’ 라고 불렸는데 자비의 모후 수녀회에서

 

운여하는 구호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최초의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초대 단장으로는 최연장자로서 관리기관 월례회장인 엘리사벳 커완이 선출되었다 .

 

후에 프랭크는 레지오 창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참된 신심”모임과 월례 모임을

 

통한 레지오 창설 사이의 연결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수는 없다.

 

너무나 많은 초자연적인섭리가 있었고 인간의 계획은 너무나 적었기 때문이다

 

“참된 신심”모임은 별 탈 없이 거의 4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 조직안에서 성모님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음에야 비로소 레지오가가 탄생했던 것이다”

 

몽포르의 성 루도비꼬는 레지오 창설에 대한 그의 예언이 실현될 때까지 무려

 

2백 60년간이나 기다렸다. 『복된신 동정녀께 대한 참된 신심』에 기록된 그의 예언은

 

다음과 같다 “성난 짐승 같은 무리들이 미친 듯이 달려와서 그 잔인한 이빨로 이

 

작은 책과 성령께서 이책을 쓰도록 이끄신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 책을 궤짝의 어두움과 침묵 속에 묻어버려 다시는 나타날 수 없게 만들리라는

 

것을 나는 뚜렷이 내다본다 그 무리들은 그책을 읽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박해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더 나아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용기를 북돋아 주며, 더욱 더

 

큰 성공을 하리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세속과

 

악마와 육신과 맞서 싸울 강력한 군단, 즉 예수님과 성모님의 용감한 남녀 군사들로

 

이루어진 대군단이 나타나리라고 기대되기 때문이다.

 

 


2) 세 숙박소 운영

 

그 당시 더블린에는 대규모의 매춘이 성행하고 있어 큰 문제였고 골칫거리였다.

 

프랭크는 레지오가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고 단원들과 함께

 

그 문제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5명의 여성 단원들과 함께 31명의 윤락녀들이

 

공동생활하는 집을 찾아가 2박3일 봉쇄피정에 초대하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31명 중

 

23명이 피정에 참가하였다. 때는 1922년 7월이었다 피정지도는 프란치스코회 신부가가

 

맡았고 피정 장소는 자비의 모후 수녀원이었는데 피정결과는 대성공이어서 그들 모두는

 

이제 더 이상 윤락행위를 하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그들이 새로이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었으나 다행히 프랭크의 노력으로 피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더블린 시로부터

 

큰 건물을 제공받았다 그 건물을 『성 마리아 숙박소』 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 후에도 윤락녀들을 위한 피정이 여러 번 실시되었는데 그때 마다 성공리에 끝나

 

성 마리아 숙박소에서 새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특기 할 만한 것은 더블린의 창녀촌으로서 죄악과 범죄의 온상인 벤틀리구역을 경찰이

 

150년간이나 정화해 보려고 시도했으나 허사였는데 프랭크를 비롯한 레지오 단원들과

 

대중 선교를 위한관 본당 기도단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두어 결국 창녀촌이 철거되었다

 

이 사건 전체는 하나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는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저서인 「술집에서의 기적」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불쌍한 부랑 남자들이 많이 그들을 위한 숙박소

 

마련 문제도 시급하였다 시 당국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다행히 프랭크가 제시한 계획과 의견이 통과되었다.

 

시 당국은 부랑 남자들을 위해 반쯤 파괴된 낡은 건물을 그에게 제공해 주었다.

 

단원들과 빈첸시오 회원들의 도움으로 수리된 이 집은 1927년 3월에 ?샛별 숙박소?

 

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세계 최초의 남성 쁘레시디움이 바로 이 숙박소 봉사자

 

남성들로 구성되어 창립되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3년 후인 1930년에는 샛별 숙박소 가까이에 미혼모들과 집 없는 극빈 여성들을

 

위한 건물도 마련되었는데 천상의 모후 숙박소로 명명되었다.

 

이 숙박소 건물 한 부분을 레지오 마리애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프랭크는 이 세 숙박소들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다행히 그는 레지오 사무실과 인접한 곳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3) 최초의 남성 쁘레시디움 (1929)

 

레지오가 뿌리를 내리기 시자하고 세계 각국으로 가지가 뻗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교구청에서는 공식 인가를 해주지 않고 계속 거리를 둔 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엔 평신도 사도직 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은 평신도 조직인 레지오

 

마리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프랭크가 레지오에서 남성들의 역학이 크게 대두됨을

 

절감하고 남성 쁘레시디움을 조직하려 하자 교구청의 인가는 고사하고 오히려 교구청

 

사제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평신도인 주제에 사제의 임무를.

 

대신하려는 사람이며 반 교권주의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이에 대한 여파로 예수회 장상들도 같은 회 소속 사제들에게 레지오의 영적 지도에서

 

손을 떼도록 지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저명한 성령 수도회 신부가 다음과

 

같이 해명을 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사제와 평신도 사이의 차이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결코 성직자의 위신이나 권위를 깍아 내리는 일은 하지

 

않았고 오히려 늘 사제들을 존경해 왔다. 다만 그와 교권자들과의 관계가 불편 해지고

 

오해가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상의 문제였다.

 

그 당시는 성직자들이 평신도사도직 활도을 불쾌하게 여기는 시대였다.

 

우리는 프랭크가 그러한 시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한

 

인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프랭크는 시대적으로 앞선 진취적인 인물이었다. 하여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첫 여성 쁘레시디움이 창단도니 지 무려 8년이 지난 1929년 12월에야 비로소

 

?샛별 숙박소?봉사자들로 구성된 첫 남성 쁘레시디움이 창단되었다 초창기부터 레지오의

 

가지 규칙을 정하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그것은 각 여성 쁘레시디움마다 경험 많고

 

유능한 남성 단원 한 명을 두어 업무를 추진해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단원을 트리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후에 남성 뿌레시디움이 생기게되자 트리뷴의 의미도 달라지게 되었다.

프랭크는 달라진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남녀를 불 문하고 영적 지도신부 대신의 자격으로

 쁘레시디움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한 사제가 많은 쁘레시디움을 맡고 있어

도저히 혼자서는 영적 지도 를 하기가 벅찰 때

그 사제의 임명에 의해 ?영적 지도자 대리?역할을 하는 사람을

 

트리뷴이라한다. 다른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남성 쁘레시디움은 1931년 11월27일

 

미국의 뉴 멕시코주 라톤의 성 패트릭 성당에서 광부들로 구성된 쁘레시디움 이었다.

 

캐나다와 중국에서도 남성득이 첫 쁘레시디움을 이루었고 아프리카 대륙의

 

첫 쁘레시디움도 칼라바르 해안의 흑인들로 구성된 남성 쁘레시디움이었다

  


4) 교황 비오 11세 알현(1931년)

 

프랭크는 레지오로 인해 사방에서 어려움이 밀어닥치자

교황청과 접촉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마침 1930년도에 로마 교구 총대리 추기경이 레지오를 알게 되어

그 창설자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게되자,

프랭크는 주님의섭리와 안배로 받아들였다.

프랭크는 영국 리버풀 교구 주교와 함께 교황청을 방문하였다.


교황 비오 11세는 그 당시 

카톨릭 운동의 교황으로 알려져 있었고 교회의 선교사업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역할과 책임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호소해 왔다.

 

교황은 레지오에 대해 질문을 하시다가 "내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랍니까?"하고 물으셨다.

이 말씀은 프랭크가 매우 고대하던 질문이었기에

"성하께서 레지오 마리애가 전세계로 확장되길 바라신다고 저희가 말할 수 있다면

 레지오 보급의 효과적인 선전 방법이 될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온 마음으로 그것을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프랭크는 그 순간에 레지오가 안전하게 구제 받은 것을 알았다.

 때는 1931년 이었다 2년 후인 1933년 9월 프랭크가 교황으로부터

레지오를 축복하는 한 통의 서한을 받음으로써 레지오는 처음으로 문서를 통해 인정받게 되었다.

그 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아름답고 거룩한 사업, 레지오 마리애에 대해 특별한 축복을 보냅니다.

 레지오 마리애란 이름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

그 단기에 새겨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 이미 착수한

그 기도와 활동의 사도직?을 더욱 더 성실히 수행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도 또한 구원의 협력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4. 레지오의 전성기 (1931~1971)


 

1) 레지오의 급속한 성장. 발전

 

1932년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성체대회에 세계 각처의 성직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그곳에 체류하는 동안 레지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국으로 돌아가 교구와 본당에 쁘레시디움을 설립,

주회를 시작함으로써 레지오가 급속도로 발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프랭크는 레지오가 모든 대륙으로 뻗어 나갔을 때에도

여전히 시청공무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두가지 큰일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을 깨닫고 

1933년1월 그의 나이 44세에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레지오에만 전념하였다.

 

1934년에는 미국에 레지오의 첫 특파원이 파견되었고

                                       1936년에는 에델 퀀이 아프리카에 파견되어 레지오를 급속도로 보급. 성장 시켰다.


  

2) 교회 일치 운동가

 

교회 일치 운도에 있어서 프랭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기 20년 전에

이미 더블린에서 메르시에 협회와 불기둥 협회를 창설하였다.

메르시에 협회는 1941년에 벨기에의 교회 일치 운동가인

메르시에 추기경(1851~1926)을 기념하여 창설되었는데

참된 신앙에 대해 비카톨릭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그리고 불기둥 협회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유다인들과의 대화 모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교회 당국으로부터 금지당해 두 협회가

동시에 문을 닫게 되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 이후에야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3) 가족의 죽음과 프랭크의 애국심

 

프랭크는 아버지가 1918년에 56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장남으로서 가족을 부양하였다.

그의 뒤에는 늘 훌륭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신중하고 포용력이 있었으며 다정다감하였다.

프랭크와 그의 모친 간의 유대관계는 각별 하였다.

그녀는 프랭크가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애썼고 잦은 이사에도 불구하고

언짢은 기색조차 하지 않았다. 프랭크는 동생들도 각별히 사랑했다.

 

그런데 그 평화로운 가정이 별안간 줄초상을 치러야 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1949년에 그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죽고 이듬해에 어머니가 별세했으며,

그다음해에는 막내 여동생마저 죽었다.

남은 가족이라곤 의사인 여동생 한 명 밖에 없었다.

 

프랭크는 악몽 같은 슬픔을 떨쳐버리기 위해 1951년부터

 동료 단원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였다.

시골기을 느긋하게 달리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즐기기에는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더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 사진 촬영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프랭크는 참된 애국자였다.

그의 애국심은 두가지 사랑, 즉 종교에 대한 사랑과 나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왔다.

그는 나라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완전한 애국자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애국심은 어디까지나 올바른 이성에 바탕을 둔 사랑이어야 하고

종교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다시 말해 애국심에는 반드시 신앙심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후에 「나라에 대한 참된 충성심」이란 소책자를 저술하면서

앞에서 말한 그의 사상을 피력했다.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참관자(1965년)


 

프랭크는 그의 일생에 있어서 비록 여러 가지 큰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명예스러운 순간도 적지 않았다

몽포르 수도회와 성령 수도회에서 그를 명예회원으로 임명함으로써

그는 이 수도회들의 모든 선익에 한몫을 차지하였다.

 

특히 몽포르 수도회에선 그에게 마리아 명예 작위를 수여하기까지 했다.

 1956년 12월 미국의 오하이오 데이톤 대학교에서는 성모학 분야에 있어서

그의 탁월한 업적의 대가로 마리아니스트상을 수여한다고 시상식의 초청장을 보냈다.

 

프랭크는 미국에 와서 잠시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수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모인 가운데 자리를 함께하였다.

 뉴욕세나뚜스 영적 지도신부가 프랭크를 마리아의 확대자 라고 소개하였다

1961년 요한23세 교황은 그에게 성 그레고리오 수도회 기사 훈장을 수여했고

1968년에는 더블린 국립대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을 수여했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명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1965년9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평신도 참관인으로 초청된 것이었다.

 

공의회 초기에는 다른 몇몇 평신도들이 초청된 반면, 

그는 초청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초청해야 한다는 것이 점차로 분명해졌다.

왜냐하면 공의회에서 교부들이 토론하고 장려하는 의제들 중의 상당부분이

프랭크가 주장했던 것들이고 실제로 레지오 제도에 흡수되었으며

레지오 교본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호기 중 적당한 시간에 공의회 교부들이 모두 성베드로 대성전에 모여 있는 자리에서

 프랭크에게 감격스런 순간이 주어졌다.

사회자인 런던의 추기경이 레지오 마리애 창설자가 그 자리에 참석해 있다고 알렸더니

 2500명이나 되는 공의회 교부들이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한참동안 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들은 전세계포교지에서 이미 레지오가 선교를 상징하는 단체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찬사와 감사를 표현했던 것이다.

 

로마에 3개월간 체류하면서 프랭크는 주로 주교들을 대상으로 32회에 걸쳐 공식 연설을 했다.

그리고 레지오의 아프리카 선교사 에델 퀀의 시복 절차에 대한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프랭크의 로마체류에서 절정을 이룬 것은 교황 바오로 6세의 초대로 개인 알현을 하는 순간이었다.

교황은 그를 포옹하면서 교회에 대한 크나큰 봉사에 대해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오래전부터 만나고 싶었다고 하였다.

교황은 후에 레지오 마리애 창설은 중세기 대수도회들 창설 이후로

교회 역사상 가장 위한 일 중의 하나였다고 천명하였다 

 

5. 프랭크 더프의 생애 말기 (1971~1980)

 

1) 레지오 창설 50주년 기념식

 

1971년 9월 7일 주일은 레지오 창설 50주년이 되는 날로서 더블린에서 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더블린 교구장은 연설에서 레지오를 높이 치하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교황청에서도 축하 서한을 보냈다 이날을 맞아 프랭크가 세계 각처에서 받은 수많은 축하 서신 가운제

 가장 큰 기쁨을 준 것은 초창기에 고통을 안겨준 조국 아일앤드의 주교단으로부터 받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였다.


 ?레지오 마리애는 베들레헴과 나자렛에서 우리 구세주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겪은 고초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어둠과 가난과 질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창설 단원들의 초자연적 신앙과 동기는 세속의 온갖 변천 속에서도

무사히 살아 남았을뿐아니라 전 세계에 걸친 확장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레지오는 다양한 기후나 민족이나 문화 상황에서도 기도와 활동의 규율을 지켜왔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수천 명의 주교들로부터 인가를 받고 교황 성하로부터 재가를 기본 헌장을

확고부동하게 보존해 온 데 대해 찬사를 보냅니다.

레지오 마리애의 초자연적 불변성은 하느님의 권능과 성령의 영감과 성모님의 보호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습니다.

 


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알현(1979)

 

프랭크는 비오11세 교황으로부터 시작하여 교황이 바뀔 때마다 개인 알현의 특전을 입었다.

 

그러나 등극한 지 33일 만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만은 예외였다.

                                                 1979년 5월 프랭크는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했다.


이분은 이미 폴란드의 크라코프 대주교로서 한 그룹의 아일랜드 순례단을 접견했을때부터

 레지오를 알고 있었다.

그당시 자신의 이상과 똑같은 레지오의 성모님게 대한 영성은 교황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프랭크는 꼰칠리움 간부들과 함께 교황 개인 경당에서 새벽 미사에 참례한 후

교황의 아침 식사에 초대받았다.

식사 동안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대화가 있었다.

 레지오의 세계적인 번창과 많은 지역에서 당면하고 있는 애로사항에 대해 대화를 하던 중

 교황 성하는 다음과 같은 의미 시방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여러분에게 메시지를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혼드 추기경의 임종 때 한젊은 사제(요한바오로 2세 자신)가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들도 큰 어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추기경은 마치 마지막 유언이라도 하듯이

마리아를 통하여 승리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를 통한 승리가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나의 메시지입니다.

작별인사를 할 때 또다시 교황 성하는 마리아를 통한 승리를 강조함으로써

모든 레지오 단원들이 명심해야 할 좌우명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3) 프랭크 더프의 덕성(德性)

 

프랭크는 뛰어난 유머 감각과 재치의 소유자로,

즐거운 농담으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 줄도 알았다.

 설득력도 대단하여 그가 사도직에 대해 애기할 때면 늘 청취자들을 감동 시켰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도 그를 좋아하며 따랐다.

그가 집에서 레지오 사무실로 건너갈때면 천상의 모후 숙박소에 살고 있는

미혼모들의 아이들이 그를 둘러싸 손을 잡기도 하고 팔에 매달리기도 했다.

가끔 그는 동심으로 돌아가 그들과 장난을 치기도 하였다.

 

그가 지닌 여러 덕성은 성모마리아의 덕성이었다.

그는 교본에 마리아의 정신과 덕목을 삽입하였다.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그의 덕성은 특히 겸손과 절제였다.

는 레지오의 놀라운 발전이나 업적을 자신의 공로로 돌린 적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레지오 창설자라고 부르는 것까지도 좋아하지 않았다.

 

쉬에넨스 추기경은 프랭크의 겸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더블린에서 개최된 레지오 창설 50주년 기념식중 내빈 석상에 프랭크가 보이지 않아

그를 찾느라고 두리번거리다가 군중속에 끼여있는 그를 발견했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도구가 되길 바랄뿐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랭크는 또한 청빈의 덕과 단순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레지오 세계총본부를 방문해 보면 누구나 건물과 사무실이 허름하고 초라한 데 대해놀란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도 대단했다.

그는 불굴의 의지를 지녔고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완고할 정도로 고집이 세었으며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 ?」라는 저서를 남길 정도로 완덕에로의 노력은 영웅적이었다.

어느날 한 친구가 에게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기사(騎士)그림을 보여주자

그는 자기도 전사(戰士)라고 말했다.

 

 

4) 후세들을 위한 TV 녹화 촬영

 

1979년 8월 미국 필라델피아의 세나뚜스 영적 지도자 몬시뉼 찰스모스와 간부들이

프랭크를 비디오 녹화 시리즈로 담아놓고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더블린에 왔다.

이미 그의 나이 90세인데다 레지오의 장래를 위해 너무 늦기전에 녹화를 해드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TV 비디오 녹화는 성공적이었다.

프랭크는 여덟 번의 회견과 열네번의 강연을 해주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협조자들도 기꺼이 회견에 응해 주었다 .

수년내에 이 귀중한 녹화 테이프들은 세계 각국으로 보급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영적 자녀들은 먼 훗날에도 레지오의 창설자를 화면을 통해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덕성을 본받고 그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5) 프랭크 더프의 죽음과 영결

 

프랭크는 1980년 11월 7일 91세의 나이로 더블린 자택에서 선종했다.

                                        그날은 첫 금요일로서 예수 성심께 대한 그의 크나큰 신심을 드러 내는 날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레지오 특파원으로 지냈던 그의 영적딸의 장례 미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임종한 날에도 두 대의 미사에 참례했다.

미사 참례를 하고 돌아오자. 식복사에세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점심식사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의사도 부르지 말아 달라고 당부 하면서 2층 침실로 올라갔다.

오후 네 시경 식복사가 따끈한 차를 가지고 올라갔을때 프랭크는 이미 임종한 후였다.

그녀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내간 문을 열었을때 난 그분이 이미 숨을 거둔 것을 알았어요.

그분은 가슴에 팔을 포갠 상태였어요.

그분은 임종 때 예수 성심상을 보고 있었을 거예요.

 그 그림을 바로 그분 맞은편에 있었으니까요.

난 그분의 눈을 감겨드리고 도움을 청하러 달려 내려왔어요.?

 

순식간에 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퍼져나갔다.

이미 그는 생존시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산 성인으로 여겨져 존경받았다.

장례는 7일장으로 지냈다.

장례미사는 성 안드레아 성당에서 추기경 1명과 3명의 대주교, 1백명이상의 신부,

아일랜드 대통령과 수상, 더블린 시장등 정치가들 및 외교 사절들이 있었다.

1500명 수용 능력의 성당에 4000명이 몰려들어 많은 사람이 바깥 거리에 서 있어야 했다.

미사 주례 추기경은 강론에서 프랭크가 1976년도에 그 해의 아일랜드인

수상자로 선정되었듯이 아마 앞으로 교회가

 

그를 20세기의 아일랜드인으로 선언할 날이 올 것 이라고 하였다

 

미사후 가족묘지가 있는 글라스네빈 공동묘지까지 행렬하였는데 장례행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축제행렬과 같은 인사을 주었다.

 

프랭크가 별세한 바로 다음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의 전보를 보냈다.

 전세계의 레지오 마리애가 그 창설자 프랭크 더프씨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나는 단원들과 함께 그의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가 창설한 이 단체는 수없이 많은 평신도들에게 복음화와 

성화에 필수적인 임무를 알게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열렬히, 효과적으로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모든 레지오 단원들에게 교황의 강복을 보내며 그를 잃고 마음 아파하는 단원들에게 위로와

앞으로의 사업에 격려를 보냅니다

 

스크랩 원문 :

♣ 청담성당 남성 꾸리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