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전라도

[전남/해남]고산 윤선도의 고택 녹우당(사적 제167호)

여울가 2011. 10. 12. 16:20

고산선생이 인조 6년 봉림과 인평 양대군의 사부를 지낸일이 있었다.

후에 왕위를 이은 효종(봉림)은 지난날 사부였던 고산선생에 대한 은혜를 생각하여

피세생활(避世生活)을 하던 선생을 불러들여 성균관에 재직케 했으나,

시배(時輩)들의 시기(猜忌)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효종이 "전승지 윤선도는 참혹하게 무함을 받았으니

필시 서울에 있기가 편안치 못하여 도로 내려가려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와같이 낭패스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실로 내가 당초에 역말로 부른 존례의 뜻이 아니다.

본원은 나의 유지를 전하여 그로 하여금 내려가지 말고 진퇴를 종용히 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받들 게 함이 좋겠다."하였다.

이 때, 효종(1652, 孝宗 3년 4월)이 미안함에 무엇인가 선생에게 보답해주고 싶고,

또, 사부인 고산선생이 멀리 해남에 계시면 왕의 과실을 충고보좌하기 어렵다 하여

가옥 한채를 하사하여 가까이 살도록 했다고 한다.

이 집을 처음에는 화성(수원)에 지어 주었는데, 고산선생이 82세이던 현종 9년(1668년, 무신년)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생활을 청산하면서 그 집의 일부를 뜯어서

해로로 백포를 통하여 해남으로 운반해와 옛모습대로 다시 지었는데,

현 해남 연동에 있는 녹우당의 사랑채가 그것이다.

이 집 당호현판(堂號懸板)에는 그 당시 해남윤씨로써 화성(華城) 주인이 되었다하여

 "以海尹華城主"라 적혔는데 지금 그 현판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집의 수원터가 어디인지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 녹우당 현판은 동국진체의 대가인 옥동(玉洞) 이서(李서: 1662~1723)의 글씨로,

이서는 조선 후기 실학 거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형제로

이들과 고산선생의 증손자인 윤두서와의 깊은 교분으로 써주었다고 한다. .

녹우라는 뜻은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집 뒤의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마치 비가 오는 소리와 같다고 해서

녹우라고 했다는 설과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에 녹우라고 했다는 설이 내려온다.

                   500여년 동안 해남 윤씨 종중을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솟을대문: 녹우당으로 들어가는 정문인 솟을 대문의 좌우로 행랑채가 'ㄱ'자형과, 우측 아래쪽에 건립된 'ㅡ'자형의 2채가 있다.

 

 

   이 대문의 아랫쪽이 약간 올라가 있는 것은  손님이 왔을 때 집안에 있던 하인이 바깥쪽 손님의 지위를 대충 알아보게 하려고...

 

 

    지붕의 위에 다시 처마용 지붕을 덧대어 지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사랑채인 녹우당

   운업(芸業)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녹우당 : 공재 윤두서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의 글씨다.

 

  정관(靜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을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녹우당 안채에는 현재 고산의 14대 종손이 거처하고 있어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다.

원래의 'ㄷ'자형 집에 사랑채를 덧붙여 'ㅁ'자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

 

양반 집에 자손을 번창을 기원하는 의미로 심었다는 회화나무

 

                                           대문의 2중 잠금장치

 

 

                         애국가 2절- 저 산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소나무 껍질이 철갑처럼 생겼다...  

고산사당 : 고산사당는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셔지고 있다.

불천지위는 4대조를 모시고 묘로 가는 대신 영구히 사당에서 모실 수 있게 하고 있는데

보통 국가에서 공이 인정될 때 나라에서 허락하는 신위이다.

매년 음력 6월 11일 이곳에서 고산에 대한 기제사를 지낸다.

 

 

 

 

어초은 사당 : 어초은 묘 아래에 있으며 매년 음력11월 15일 이 사당에서 시제사를 지낸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건물고 전면 반칸 폭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어초은 윤효정의 묘 : 이곳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아 어초은공파의 파조가 되며

해남윤씨가 이후 번창하게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묘역은 녹우당 뒤편 적송이 우거진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적선을 많이하여 '삼개옥문 적선지가'라는 이름을 남겼다.

 

 

 추원당 : 고산의 12대 종손인 윤정현(1882년~1950년)이 1935년 발의하여 어초은 재각인 추원당을 건립하였으며

이 곳 추원당에서는 제관과 참배하는 후손들이 숙식을 하며 문중회의를 하는 곳이다.

 

 

 

 

비자나무숲 :녹우당 뒷산인 덕음산 중턱에 500여년된 400여그루의 비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 숲은 어초은이 "뒷산의 바위가 보이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을 남기자 후손들이 나무를 심고 보호한 이 숲은

인공 숲을 문화적, 생태학적 보존 가치가 높아 1972년 7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