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경상도

[경북/영주]배흘림 기둥의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절집 부석사

여울가 2011. 11. 24. 11:25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

부석사는 소백산부석사이도 하고,

태백산 부석사이기도 하고,

또   봉황산 부석사이기도 하다.

절 뒤편으로 솔숲이 우거져 있고

솔숲 아래로 떡갈나무등이 있어

마치 봉황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는 천년의 세월이 살아 숨쉬는 듯한 상쾌한 균형과 절제미가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더하고 뺄것 하나 없는 완벽함을 자랑하는 배흘림 기둥의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국보 5점, 보물 5점을 지닌 호국사찰이다.

 

무량수전 안에 아미타불을 모셔 놨는데

당시 왕이 계시는 동쪽을 보고 앉아 있다.

왕에 대한 충성심과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불당 안의 배흘림 기둥을  도는 횟수에 따라

한번 돌면 죽기전에 하루만 아프고 죽고 두번 돌면 이틀...

우리는 과연 몇바퀴를 돌았을까요?

우린 극락을 관장한다는 아미타불께 절을 하고 세바퀴를 돌았다.

그래도 3일은 앓다가 죽어야 자식들이 덜 섭섭해 할 까 봐서..ㅋㅋ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목조구조 기술의 정수라는 배흘림기둥이 있어

건축미의 극치를 보여주며 우리나라 목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히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이다.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며,

건축미가 주는 고색 창연함이 더욱 고풍스러운 느낌을 갖게하여 천년 고찰의 면목을 실감케 해 준다.

 

 

 

 무량수전 맢 석등(국보 제17호)

통일신라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빼어난 조각 솜씨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다.

높이 2.97m의 8각 기둥은 불빛이 퍼져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위로는 연꽃 무늬를 조각해 놓은 상륜부(윗받침돌)를 얹어 놓았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연꽃봉우리를 쥐고 선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석등은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조각물로 지칭되고 있다.

무량수전의 오른쪽 뒤편에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데 3부석이라는 바위들이다.

뜬돌이라는 뜻의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글씨가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

이 바위들은 부석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선묘낭자의 넋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의상대사를 흠모한 선묘낭자가 유학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따라가기 위해 몸을 바다에  던져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의 뱃길을 호의하였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절을 지을 때 이 돌들이 공중으로 세번씩이나 뛰어 올랐다고 전해진다.

 

 

 

 

 

 

 조사당(국보 제19호) - 이 건물은 부석사의 제2 목조건축물로 의상대사의진영을 모시고 있다.

무량수전에서 오른쪽 길을 100m만 오르면 볼 수 있는 조사당을 그동안 한번도 오르지 않았었는데

다른 여행자들도 여기까지는 잘 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부석사에 갈 양이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매우 중요한 국보인 건물과 나무가 있다는 사실...

의상대사는  부석사를 지은 후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는데

1918년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우왕3년(1377년)에 건축되었다고 하며,

순수한 고려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건물의 처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학명:골담초)는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지팡이를 꽂자 자라게 된 나무라고 전해오며

비와 이슬을 전혀 맞을 수 없는 처마 밑에서도 천년을 죽지 않고 잘 자라고 있다고...

그 키는 처마를 닿지 않으며 잎을 따서 끓여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무 잎을 따 가자 할 수 없이 나무에 철망을 씌워 두었다.

언젠가는 이 고을 원님이 이 나무 밑둥 한개를 잘랐는데

그 후 그 원님은 이유없이 죽었다고 한다.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딱딱한 땅에서 어떻게 이 나무가 죽지않고 살 수 있을까?

바로 뒤에는 산이 있고 이 나무의 뿌리가 나무 높이의 약3배 가량 땅속에서 자란다고 하니

아마도 뿌리가 깊어서 수분을 흡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보물 제249호)

 높이 526cm.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형식이다.

하층기단은 8매의 돌로 구성되었는데 중석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표현했다.

하층갑석은 6매의 돌로 되었고, 그 윗면에는 상층기단을 받치기 위한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2단 굄을 두었다.

상층기단은 각 면에 우주와 탱주 1개씩을 새겼으며, 2매의 돌로 구성된 갑석 밑에는 부연이, 위에는 각형의 2단 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옥신석은 우주만 표현했고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이러한 석탑 형식은 9세기 중엽에 건립된 보림사 동서3층석탑과 합천의 청량사3층석탑, 산청의 단속사지동서3층석탑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960년 석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3층 옥신에 있는 사리구멍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나

기단부에서 철제탑·불상파편·구슬 등이 수습되었다.

 

우리가 너무 늦었구나..이 은행나뭇길의 은행나뭇잎들을 만났어야 했는데....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내려다 보이는 소백산 줄기들

 

 

 

부석사 입구의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석사에 오르는 언덕 아래에 조성해 놓은 연못과 폭포...

가을 햇살에 피어오르는 무지개가 매우 아름다웠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옛날 시골 담장을 대신했던 탱자나무와 탱자 열매...

 

 

                                                                                                 (사진은 다음까페sunje2032에서 퍼왔습니다.)

 

*부석사소조여래좌상(국보제45호)-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