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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북촌]도이 김재권다니엘 시인과 함께 하는 북촌 문학기행(17)-중앙 중.고등학교

여울가 2015. 11. 10. 21:21

 

♡도이 김재권 시인과 함께 하는

북촌 문학 기행(17)

 

17. 국가 지정 사적 중앙중.고등학교 본관,동관,서관

 

북촌에서 빠져서는 안될 중앙중고등학교는

겨울연가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교문을 들어서면 500년생 은행나무가

반겨주고, 약간의 언덕을 올라가면 본관이 나타난다.

 

본관의 건물이 유럽의 건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첫눈에 보이는 것은 인촌 김성수선생의 동상이다.

인촌 김성수는 양부인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중앙고보를 인수했다고 한다.

 

동관과 서관의 건물은 붉은벽돌로 되어있고

담쟁이 넝쿨이 짙은 가을색을 뿜어내고 있다.

김성수 선생의 부친 동상도 눈길을 끈다.

 

운동장도 엄청 넓고 오른쪽 아래로는

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이 학교 출신의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

이상화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백릉 채만식 문학비, 3.1운동 책원비, 6.10만세 기념비, 삼일기념관 등이 있다.

 

*일제에 항거한 인촌 김성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는 189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호남의 거부였던 김경중(金暻中)의 아들로 출생하여

1,200석의 토지를 보유한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가 되었다.

창평의 창흥의숙과 영학숙에서 공부했다.

 유학자 김인후의 후손인 김성수는 13살에 의병장 고경명의 후손인 18살 고광석과 혼인했다.

 

김성수는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죽마고우인 송진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김병로, 김준연 등을 만났고

유학생 50여 명에게 학비를 지원해 주었다.

 

김성수는 귀국하여 민족교육을 통한 인재배양(人材培養),

산업진흥에 의한 경제자립(經濟自立),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언론창달(言論暢達) 등

세 가지 목표를 수립했다.

1915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이 된 김성수는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1919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경성직뉴회사를 인수하여

경성방직회사를 창립하여 민족자본 육성에 매진했다.

1920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헌신했다.

1918년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비밀리에 3.1운동을 준비했다.

밀정의 밀고로 송진우는 투옥되었고 김성수는 체포됐다.

김성수는 김좌진 장군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보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22년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는

구호로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국산품 장려, 금주금연, 자작자급, 소비절약 등을 벌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하며 실력양성에 기여했다.

 

삼일 기념관은 원래 중앙고보 숙직실이었다. 이곳은 3.1운동의 태동장소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곳이다. 1919년 당시 중앙고보 교장 송진우와 설립자 김성수, 그리고 교사 현상윤 등이

이 학교 숙직실에 모여서 최초로 독립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서 작성 등 3.1독립운동의 계획을 세운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