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전라도

[전남/해남]땅끝의 아름다운 절 달마산 미황사

여울가 2011. 10. 13. 14:19

“검은 소와 금인이 담긴 이름, 미황사”

<미황사 사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신라 경덕왕 때의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화상은 사람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는데 배는 바닷가에 다다랐다.

배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고,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 불상과 경전을 어디에 모실지 의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본래 우전국의 왕으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고 있던 차에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 온 것이오.

경전과 불상을 소 등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모시도록 하시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난 다음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쓰러지더니 ‘미(美)’소리로 크게 울면서 죽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세웠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따온 것이고, ‘

황’은 금인(金人)의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상세설명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조선 선조 31년(1598)에 다시 지었고,

영조 30년(1754)에 수리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 불상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특이하게

연꽃무늬에 자라, 게 따위를 조각한 돌을 사용하였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천장 속을 가리고 있는 형식인데 가운데에 불교어인 ‘범(梵)’를 선명하게 새겨 놓았다.

미황사 뒷산에는 ‘토말(土末)’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우리 나라 육지의 끝을 표시한 것이다.

 

 

 

 

 

 

 

 

 

 

 

 

 

 

 

 

 

 

 

 

 

 

 

 

 

 

 

 

미황사 괘불탱 보물1342호

소 재 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배치하고, 아랫부분에 용왕과 용녀의 모습을 그린 괘불(掛佛)이다.

괘불(掛佛)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미황사(美黃寺)에 있는 이 괘불(掛佛)의 크기는 길이 1170㎝, 폭 486㎝로,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강조한 뒤, 아랫부분에 용왕과 용녀의 모습을 그렸다.

본존의 얼굴은 귀·눈·입·코 등이 작으며, 정수리 부분에 상투 모양의 육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윤곽선만 표현되었고,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안에 입은 옷은 가슴을 드러내어 허리부분에서 띠매듭을 묶었고,

옷은 격자무늬를 장식하여 18세기 후반기 그림에서 보이는 문양을 엿볼 수 있다.

이 괘불(掛佛)은 조선 영조 3년(1727)에  탁행(琢行)·설심(雪心)·희심(喜心)·임한(任閑)·민휘(敏輝)·취상(就詳)·명현(明現) 등이 그렸는데, 본존불을 크게 강조한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녹색과 적색의 밝은 선염(渲染)과 녹두색·분홍·황토색이 사용되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