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에서/충절의 고장, 문화도시 영월이야기

영월 풍물패의 스승이신 고 김규성 단장님 추모 사진전

여울가 2019. 3. 18. 23:04

지난 1월 29일

영월의 큰 별 한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장구를 비롯한 풍물놀이를 이끌어 가신

'터를 일구는 사람들'의 단장님이셨던

김규성님...

 

올해 60세 라시던가?

난 한번도 뵌적이 없는 분이지만

그의 제자와 친구들이 홀연히 떠나신

김규성님을 추모하면서

49제 추모사진 전시회를 4일동안

열었고, 오늘은 버스킹 방식의 공연도

열었다.

봄을 재촉하는 늦겨울비가

흩뿌리던 지난 금요일 추모행사에

참석했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소풍 떠나신 그분이 아깝고,

보내 드리는 분들의 아름다운 마음이

감사해서...

고 김규성님의 명복을 빈다.

 

그분의 절친이신 화가 백중기 님이

페이스북에 올린 추모글을 허락도

없이 옮겨왔다.

그냥 지나치기엔 글이 너무 아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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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스산하고 슬프다.

나의 가여운 벗 김가가 신새벽 세상을 떠났다.

 

나는 중학교시절 우리동네로 이사온 김가를 처음 만났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고 그저 놀고있었는데 바로 친해졌고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나곤 했다.

그는 학교 대신 도시의 변두리 공장소식을 전해주곤했다.

 

내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그와 나는 자주 만났다.

그가 떠돌이를 멈추었기 때문이고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그와 나는 늘 할말이 많았고 서로 안부를 챙겼다.

 

그무렵 김가는 오로지 혼자였다.

그의 아비는 정처없이 떠도는 인생으로 살다 찬겨울 지켜보는 이 없는 곳에서 객사하였다.

그가 군대 간 사이 마을에 살던 어미는 야밤에 기약도 없이 마을을 떠났다.

그가 귀여워했던 막내 남동생마저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의지하며 함께 살던 할머니가 돌아가신후 오로지 홀로된 김가는 방 두칸의 낡은 집에 자신을 가두고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나는 김가처럼 그 삶의 내력이 쓸쓸한 사람을 잘 알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우리동네에 다시 정착했고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그때 김가와 비슷하게 생겨먹은, 고등학교를 못 마치고 겨우 중퇴한 엄가를 만났다.

우리는 틈나는데로 김가의 집에 밤이면 모였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김기와 엄가 백가는 매우 독특한 3총사여서 주변인들은 멀찌감치서 우리를 바라만 볼뿐이었다.

 

우리들 무리에 균열을 낸 것은 대학동창인 화가 주재현이었다.

 녀석은 내 허락 없이, 기별도 없이 우리동네에서 그림을 그리겠다며 처들어왔다.

 

김가의 방 두개중 세평남짓한 방은 덩치 큰 털보 주가의 작업실이 되었다.

신이난 김가는 옆동네 쌍용양회로 출근을 했고 주가가 날마다 배웅을 하고 낮으론 그림을 그렸다.

 

갑자기 4총사가된 김가 엄가 주가 백가는 김가와 주가가 함께 사는 집에 거의 매일 모여 잡담하고 노래를 불렀다.

주말이면 주가의 연인 이승민씨가 술을 싸서 내려와 잔치를 벌였다. 

 작은 동네가 밤마다 노랫소리로 시끄러워도 시끄럽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없었다.

 

아, 기쁘고 설레는 일들은 호흡의 줄기가 왜 이리 가녀리고 짧은가.

 

1년이 흘렀을때 화가 주재현이 홀연히 세상을 떴다.

우리는 모두 말을 잃었고 김가는 다시 두 칸의 한 방으로 숨어들었다.

 

김가야, 너 꽹과리를 처보지 않으련?

마침 읍내에 생긴 풍물모임을 소개했다.

김가는 다시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로 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김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장고잡이중 하나이며

 영월풍물패를 이끌고 다지고 창조하는 상징이되었다.

서른 중반에 처음 쇠를 잡은 그가 이리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재주와 더불어,

 잠자는 시간을 빼곤 이 처소에 목숨걸고 머물렀기때문이다.

 

몸은 그에게 사치스러워 돌봐야할 것이 아니었던가.

지난달 그에게 전화가왔다.

"중기야 며칠 후 정기공연에 올 수 있겠나. 바쁘면 오지말어. 그냥 알려만 주는 거여"

"근데 너 목소리가 왜 이러냐. 숸 소리가 난다"

"아 이거? 연극연습하느라 목이 쉬었어. 근데 중기야 너 몸관리 잘해라.

나이 들으니 영 몸이 예전같지 않구나야"

 

며칠 후 공연을 마친 다음 날 그가 쓰러졌다.

나는 그 공연에 가지 않았는데 김가의 공연은 언제고 오래오래 볼 수 있겠기 때문이었다.

 

일찌기 주가와 이별한 우리는 20년 넘게 3월이 다 가는 날 한 번도 빠짐없이 모여 화가 주재현을 기렸다.

한 때 4총사였던 우리는 이제 엄가와 나 둘만 남았다.

김가의 앳된 아내와 주가의 영원한 정인인 승민씨와 함께.

 

벗을 가까이에서 보내야하는데 병상에서 이별의 근처를 더듬는 내 모습이 가련하다.

 

서늘하고 쓸쓸하고 덤덤하고 아리고, 어느 언저리에서 분노가 인다.

 

지나간 모든 의미있는 것들은 세월과 더불어 풍화되어 그리움으로 정다움으로 남을 거라지만,

내 벗들을 추억함은 그저 쓸쓸함에 머문다.

함께 부디꼈던 우리들의 가치는 늘 이 시대의 초라한 변방의 삶으로 규정되고 잊혀지려하기에...

 

이 처연한 삶으로 부터 벗어날 수는 없으리리랴만, 그것이 사람살이의 숙명이라지만,

나는 그리 부질없이 정의하지 않겠다.

균열을 내고 무엇인가 깨뜨리려 두 눈 부릅뜨겠다.

우리는 결코 그리 시시하게 살지 않았지않은가.

 

잘가라.

김가야. 규성아...

우리들의 꿈들이 그리울게다.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멋있어 했던가.

 

육신을 모두 벗은 때에, 파란 하늘 구름이거나 나뭇가지 사이

부는 바람으로 다시 만나자.

(백중기 님 글을 옮겨 옴)